조선의 한강변 정자, 모두 풍수 명당터에 건립돼
조선시대 절경으로 유명했던 한강 변의 정자 효사정(서울 동작구 흑석동 소재)은 현재도 서울 야경 명소로 소문나 있다. 효사정 아래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편엔 남산과 북한산이 눈에 들어온다. 안영배 기자
이 시를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났다. 바로 서울 지하철 9호선 흑석역 근처 효사정(孝思亭)에서다. 한강 변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정자인 효사정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그날이 오면’ 시비(詩碑)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효사정 인근의 동작구 흑석동 성당이 심훈이 태어난 생가터였다. 관할구청이 이를 기념하고자 이곳에다 시비를 세운 것으로 보였다.
막상 효사정에 오르고나니 삼각산과 한강을 표현한 심훈의 시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효사정은 바로 밑으로 거대한 한강이 서해로 빠져나가고, 강 건너 북쪽 건물군 너머로는 북한산(옛 명칭은 삼각산)이 멀찌감치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그날(광복)이 오면’ 숨죽이고 있던 북한산 지맥(地脈)이 되살아나 더덩실 춤을 출 것이고, 또 일제에 의해 더럽혀진 우리 땅을 한강 물이 치솟아올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고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효사정은 서울을 풍수적 감각으로 표현한 시인의 감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효사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중국에까지 소문났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을 찾을 때마다 필수 관람코스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아쉽게도 옛 효사정은 사라졌고, 현재의 정자는 1994년 옛 문헌을 참고해 지금의 자리에 신축한 것이다. 효사정의 현판 글씨는 노한의 17대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이 터가 원래의 효사정 자리인지 논란은 있으나, 오래 전부터 명당으로 소문났었다. 대일항쟁기에 일제는 이곳에 한강신사(漢江神社)를 건립했다. 한강신사 건립 유래기에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 신령스러운 산)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으로 소개돼 있다. 일제는 그렇게 우리나라 방방곡곡 신령스런 명당 터에 신사를 세웠다. 실제로 효사정 터는 풍수 길지(吉地)로 판단된다. 동작동 국립묘지 쪽 서달산에서 내려온 한 지맥이 한줄기 끈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져 내려와 불끈 솟아오른 곳이 바로 효사정이다.
정조 임금이 행궁으로 사용한 용양봉저정. 안영배 기자.
1795년 정조의 화성능행 을 묘사한 ‘정조능행도’ 중 한 곳인 ‘노량주교도섭도’. 오른쪽 상단에 용양봉저정이 장엄하게 묘사돼 있다.
1791년에 준공된 용양봉저정은 명당일 뿐만 아니라 한강 조망이 매우 빼어난 곳으로 유명했다. 정조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넌 후 쉬어가던 행궁(임금의 나들이 때 머물던 별궁)의 중심 건물로 사용됐다.
● 풍수로 본 한강 변 누정
조선시대 한강변에는 약 75개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를 합친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들은 산천 경계가 아름다운 곳에다 정자를 지어 즐기는 게 커다란 로망이었다. 개인 소유의 정자를 가졌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한껏 과시할 수 있던 시대였다. 특히 한양도성과 가까운 한강변에 자리한 정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다. 권문세족 등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여기에 더해 누정이 얼마나 풍수적 가치가 있는 곳인가에 따라 서열과 위상이 평가되기도 했다. 즉 누정은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외적 환경 뿐만 아니라 명당 길지라는 무형적 기운까지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망원정. 조선 태종의 아들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있을 때는 ‘희우정’으로 불렸다가 1484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면서 ‘먼 경치가 잘 보인다’는 의미로 ‘망원정’으로 불렸다. 김미정 씨 제공
논문은 구체적으로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돼온 용양봉저정과 효사정, 망원정(마포구 합정동), 소악루(강서구 가양동) 등 복원된 후 문화재로 등록된 누정에 대해 풍수적 진단을 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누정이 대부분 돌혈(突穴; 종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볼록하게 솟아오른 곳)이나 와혈(窩穴; 소쿠리나 쟁반처럼 오목하게 생긴 곳) 명당에 세워져 있으며, 누정 주변의 한강 물길이 대부분 토성수(土星水; 물길이 터를 각지게 안고 돌아가는 모양새로서 풍요와 부를 상징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염원이 한강변 누정 문화에서도 엿보인다.
조선 사대부들이 풍수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강변 길지에 누정을 세워 자신들의 세도를 자랑하고 싶어했던 심리는 오늘날에도 통한다. 현재의 서울 사람들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를 부의 상징으로 여기고 그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누정이 자리했던 한강변 대부분이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