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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이 꼽은 한강변 핫플레이스는?[안영배의 웰빙풍수]

입력 | 2023-05-18 11:00:00

조선의 한강변 정자, 모두 풍수 명당터에 건립돼




조선시대 절경으로 유명했던 한강 변의 정자 효사정(서울 동작구 흑석동 소재)은  현재도 서울 야경 명소로 소문나 있다. 효사정  아래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편엔 남산과 북한산이 눈에 들어온다. 안영배 기자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민족시인 심훈이 조국광복을 열망하며 지은 시 ‘그날이 오면’의 첫구절이다. 광복의 그날이 오면 종각의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릴 것이며, 설령 두개골이 부서져 죽더라도 기뻐하겠다는 시인의 결기가 담긴 시다.

이 시를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났다. 바로 서울 지하철 9호선 흑석역 근처 효사정(孝思亭)에서다. 한강 변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정자인 효사정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그날이 오면’ 시비(詩碑)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확인해 보니 효사정 인근의 동작구 흑석동 성당이 심훈이 태어난 생가터였다. 관할구청이 이를 기념하고자 이곳에다 시비를 세운 것으로 보였다.

막상 효사정에 오르고나니 삼각산과 한강을 표현한 심훈의 시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효사정은 바로 밑으로 거대한 한강이 서해로 빠져나가고, 강 건너 북쪽 건물군 너머로는 북한산(옛 명칭은 삼각산)이 멀찌감치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그날(광복)이 오면’ 숨죽이고 있던 북한산 지맥(地脈)이 되살아나 더덩실 춤을 출 것이고, 또 일제에 의해 더럽혀진 우리 땅을 한강 물이 치솟아올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고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효사정은 서울을 풍수적 감각으로 표현한 시인의 감성이 느껴지는 곳이다.

효사정은 600여 년 전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1376∼1443)이 세운 건축물이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한 뒤 묘지 북쪽 바위 언덕 위에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이곳에 수시로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북쪽 개성에 묻힌 아버지를 추모했다. 이러한 노한의 효성을 기리는 의미로 효사정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효사정은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중국에까지 소문났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을 찾을 때마다 필수 관람코스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다. 아쉽게도 옛 효사정은 사라졌고, 현재의 정자는 1994년 옛 문헌을 참고해 지금의 자리에 신축한 것이다. 효사정의 현판 글씨는 노한의 17대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이 터가 원래의 효사정 자리인지 논란은 있으나, 오래 전부터 명당으로 소문났었다. 대일항쟁기에 일제는 이곳에 한강신사(漢江神社)를 건립했다. 한강신사 건립 유래기에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 신령스러운 산)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으로 소개돼 있다. 일제는 그렇게 우리나라 방방곡곡 신령스런 명당 터에 신사를 세웠다. 실제로 효사정 터는 풍수 길지(吉地)로 판단된다. 동작동 국립묘지 쪽 서달산에서 내려온 한 지맥이 한줄기 끈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져 내려와 불끈 솟아오른 곳이 바로 효사정이다.

정조 임금이 행궁으로 사용한 용양봉저정. 안영배 기자.

1795년 정조의 화성능행 을  묘사한  ‘정조능행도’ 중  한  곳인 ‘노량주교도섭도’.  오른쪽 상단에 용양봉저정이 장엄하게 묘사돼 있다. 

효사정만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인근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동작구 본동)도 그렇다. 효사정에서 불과 1km 남짓한 거리로, 한강대교 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과도 인연이 깊다. 원래는 영의정을 지낸 이양원 소유의 정자였고, 서해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해정(望海亭)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정조가 이 정자를 매입한 후 이름이 바뀌었다. 정조는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훨훨 나는 것 같다”고 하여 용양봉저정이라고 고쳐 지었다. 심훈이 묘사한, ‘더덩실 춤추는 삼각산과 용솟음치는 한강’ 표현과도 사뭇 유사하다.

1791년에 준공된 용양봉저정은 명당일 뿐만 아니라 한강 조망이 매우 빼어난 곳으로 유명했다. 정조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넌 후 쉬어가던 행궁(임금의 나들이 때 머물던 별궁)의 중심 건물로 사용됐다.

이처럼 조선의 지배계급은 정자를 지을 때도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좋은 기운이 서린 터를 골랐다. 이는 정자가 단순히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속에서 좋은 기를 받아들이며 심신을 함양하는 수양 장소로도 활용됐음을 의미한다.

● 풍수로 본 한강 변 누정
조선시대 한강변에는 약 75개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를 합친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들은 산천 경계가 아름다운 곳에다 정자를 지어 즐기는 게 커다란 로망이었다. 개인 소유의 정자를 가졌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한껏 과시할 수 있던 시대였다. 특히 한양도성과 가까운 한강변에 자리한 정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다. 권문세족 등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여기에 더해 누정이 얼마나 풍수적 가치가 있는 곳인가에 따라 서열과 위상이 평가되기도 했다. 즉 누정은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외적 환경 뿐만 아니라 명당 길지라는 무형적 기운까지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망원정.  조선 태종의 아들인 효령대군의 별장으로 있을 때는 ‘희우정’으로 불렸다가 1484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면서 ‘먼 경치가 잘 보인다’는 의미로 ‘망원정’으로 불렸다.  김미정 씨 제공

이와 관련, 한강변에 지은 조선시대 누정들을 풍수적으로 본격 해석한 논문 ‘풍수경관으로 본 한강 누정의 입지 연구’(김미정)가 최근 발표돼 주목을 끈다. 논문은 “한강 변에 위치한 누정은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대부분 풍수적 길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 “경치 좋은 곳에서의 휴식조차도 풍수적 길지에서 해야 한다는 조선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논문은 구체적으로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돼온 용양봉저정과 효사정, 망원정(마포구 합정동), 소악루(강서구 가양동) 등 복원된 후 문화재로 등록된 누정에 대해 풍수적 진단을 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누정이 대부분 돌혈(突穴; 종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볼록하게 솟아오른 곳)이나 와혈(窩穴; 소쿠리나 쟁반처럼 오목하게 생긴 곳) 명당에 세워져 있으며, 누정 주변의 한강 물길이 대부분 토성수(土星水; 물길이 터를 각지게 안고 돌아가는 모양새로서 풍요와 부를 상징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염원이 한강변 누정 문화에서도 엿보인다.

조선 사대부들이 풍수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강변 길지에 누정을 세워 자신들의 세도를 자랑하고 싶어했던 심리는 오늘날에도 통한다. 현재의 서울 사람들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를 부의 상징으로 여기고 그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누정이 자리했던 한강변 대부분이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한편 ‘누정 풍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19일 한국건축역사학회의 춘계학술대회(수원전통문화관 예절교육관, 14:20∼16:0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풍수경관으로 본 한강누정의 입지 연구’ 논문을 비롯해, ‘상량식을 통한 건축과정과 전통사상의 관계연구’(김혜련),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풍수환경 연구’(배영한), ‘심곡서원의 풍수환경 연구’(최덕수), 중국 성도(成都) 도시공간의 변황와 풍수지리 상관관계’(왕이청) 등 다양한 풍수 연구 논문들도 발표된다. 참가비는 없으며 누구나 참관이 가능하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