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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책[이은화의 미술시간]〈267〉

입력 | 2023-05-18 03:00:00


금발의 소녀가 머리카락과 망토를 바람에 흩날리며 벼랑에 서 있다. 되돌아가지도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못한 채 발아래 황량한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는 무엇 때문에 책을 안고 저곳에 홀로 서 있는 걸까?

19세기 미국 화가 이스트먼 존슨은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유명 정치인의 초상화로 유명하지만 풍경화나 일반인을 모델로 한 풍속화에도 능했다. ‘내가 두고 온 소녀(1872년경·사진)’는 그가 48세에 그린 것으로 남북전쟁 시기의 한 소녀를 묘사하고 있다. 앳된 모습이지만 손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어 기혼임을 알 수 있다. 소녀는 전쟁터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벼랑 위를 걷고 있다. 발아래 보이는 땅은 울타리로 반반 나뉘었고, 주변은 안개와 먹구름이 휘감고 있다. 내전에 휩싸인 불안한 세상을 암시한다.

사실 이 그림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에 그려졌다.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은 끔찍한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 사회는 여전히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내전이었기에 유럽의 화가들처럼 전쟁터의 영웅을 미화할 수도 없는 노릇. 존슨은 전쟁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과 불안한 분위기를 포착해 묘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림 제목은 18세기 영국 민요에서 따왔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고향에 두고 온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로, 남북전쟁 시기에 남군, 북군 모두에게 인기를 끌며 불렸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존슨은 늦은 나이에 결혼해 두 살배기 딸을 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가족의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던 시기였다.

소녀가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책들은 성경이나 문학, 혹은 철학책일 터다. 그 책들이 과연 그녀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어쩌면 화가는 그림을 통해 묻고자 했을 테다. 책으로 전파된 세상의 온갖 지식과 종교, 문학, 철학, 사상은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 정치인들이 결정한 전쟁에 왜 젊은이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라고.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