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2012년 5월 당시 박지원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모습. 동아일보 DB
“내가 아는 명리학자가 있는데 앞으로 7년간 운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 원래 정치인이 고난을 겪는 사주여야지 대성한다. 나는 감방도 한번 갔다 왔고(웃음). 1942년생의 시대가 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김정일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 42년생 중에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죽었고 그다음 나다. 청와대에 잘 출입하고 있어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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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를 포함한 기자들과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는 다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끊임없이 권좌를 지향하는 게 그다. - 취재 메모 중 -
이를 두고 일각에선 “노욕(老慾)에 끝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그래도 그만큼 열정적인 경험과 지혜가 많은 원로가 없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감탄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때문에 호불호를 떠나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그의 왕성한 활동엔 권력욕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한지 모른다. 그에겐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라 ‘권력욕은 나의 힘’인 셈이다.
하지만 비호감을 갖는 ‘안티’도 많다. 누리꾼은 그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는 의미로 ‘박쥐원’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노욕을 부린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방송이나 강연에서 “제가/ 그/ 유~명한/ 박지원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름부터 원래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과 같아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 역시 언론과 SNS에 끊임없이 매일 등장하니 삼척동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7화]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후 그의 행적으로 돌아가 보자.
●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 살아
2003년 6월 대북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구속영장이 발부된 직후 박지원 전 원장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서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박지원이 검찰에 구속돼 징역 3년의 유죄 판결을 받는 계기가 된 ‘대북송금 의혹’은 2002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 처음 불거졌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에서 4900억 원, 당시 환율로 4억 달러를 긴급 대출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겨줬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듬해 1월 말 감사원은 ‘4000억 원 중 1760억 원은 현대 계열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나머지 2240억 원은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파문이 커지자 DJ도 퇴임을 앞둔 이듬해 2월 사실관계를 인정하며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이 서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이 안심하고 살면서 통일에의 희망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충정에서 행해진 것”이라며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는 수감 중 녹내장 등 건강이 악화돼 구속집행정지와 형집행정지를 반복하다 석방됐고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 당 대표 1번, 비대위원장 3번, 원내대표 3번 기록
재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DJ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이 고등학교를 나온 전남 목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지만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 이상 형 확정자 배제’ 원칙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목포시민의 평가를 받겠다”며 탈당한 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지원 유세와 동교동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이후 재선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2010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2012년 민주당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는 등 의원 시절 동안 민주당에서만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2번씩, 2016년 안철수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에서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 당 대표까지 지내는 정치사의 신기록을 세웠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정보력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2009년 7월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였던 천성관 씨와 스폰서 박모 씨의 해외 골프 여행, 천 씨 부인의 면세점 쇼핑 명세 등을 폭로하며 후보자 사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포함해 원내대표로 청문회를 지휘하면서 7명의 청문 대상자를 낙마시켜 ‘청문회 낙마 7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호남 세력이 결탁했다는 ‘이박 담합’ 논란도 불러왔고 구정치의 상징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잦은 SNS와 방송에서 가끔 근거 없는 의혹 제기나 말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적지 않다. 2014년 1월 당시 같은 당 중진 의원의 비판이다.
“SNS에 글 올리기 좋아하는 X들은 먼저 생각을 안 하고 말이랑 행동이 앞서서 문제야. 너무 경망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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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전 원장 측 제공
박 전 원장은 DJ 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계속 알리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일각에선 지나치게 DJ를 팔아 자기 정치를 하려 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 2015년 2·8 전당대회 낙마 이후 탈당-신당 합류까지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15년 2·8전당대회에선 2012년 대선에서 낙마한 뒤 당 대표 후보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당초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법을 통과시키고 특별사면이 미뤄지는 등의 과정에서 친노·친문 세력과는 멀어진 그였다. 다음은 그가 2014년 12월 한 이야기다. “2년 전 문재인 낙선 직후 만났다. DJ의 길을 갈 거냐 이회창의 길을 갈 거냐 선택해야 한다며 설명해줬다. DJ는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DJ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DJ가 돌아오고 대통령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DJ는 결국 돌아와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보수우파인 김종필 전 총재(JP)를 영입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느냐. 이회창의 길을 봐라.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복귀해서 손에 피를 묻히더라. 자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조순 총재를 쳐내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넘어온 이기택을 쳐내고 박근혜 당시 대표가 오겠다는 걸 쳐내버렸다. 피를 묻혀서 대통령 후보는 됐지만 대통령은 안 되더라. 그랬더니 그가 굉장히 좋은 얘기라고 참고하겠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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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로서 정책 준비에 골몰해야지 당 대표로서 각종 논란에 휘말리면 안 되는 만큼 당 대표로 나서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취재 메모 중 -
전당대회에서 낙마한 뒤에도 문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던 그는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에서 ‘친노패권주의’가 논란이 되며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자 2016년 1월 탈당했다. 같은 해 3월 국민의당에 합류했고 4·13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는 기염을 토하며 박지원도 20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당선 직후 그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다.
“안 대표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다. 탁월하다. 그런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있냐. 깜짝 놀랐다. IT 강국, 신지식을 얘기했던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안목이다. 나도 통합론자였지만 결국 김한길 천정배 박지원이 틀리고 안철수가 맞았던 거 아니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따라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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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총선 전에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야권연대와 후보 단일화 논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안 의원이 이에 동조하지 않은 덕분에 국민의당이 ‘녹색 돌풍’을 일으켰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는 국민의당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안 의원을 DJ급으로 모시며 킹메이커 역할에 전념한다.- 취재 메모 중 -
●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 총대 멨지만… ‘문모닝’ 별명만 남아
2016년 12월 국민의당 원내대표 시절 박지원 전 원장. 동아일보 DB
▶초선의 선생님 된 박지원 ‘깨알 강의’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504/77925005/1
박지원은 제3당의 원내대표로서 법안 처리 등의 캐스팅보트를 쥔 3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회의 중심에 섰고 안 의원이 국민의당 총선 리베이트 사건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8월 당시 국민의당 6선 의원이었던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사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박지원 대표가 잘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분이라고 하던데…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을 다 합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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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국면에서도 그는 “탄핵 열차는 출발했다” “개가 짖어도 ‘탄핵 열차’는 달린다” “법꾸라지 김기춘” 등 어록을 내놓으며 정국의 중심에 섰다. - 취재 메모 중 -
하지만 ‘정치 9단’인 그도 결국 틀렸다. 문 전 대통령 비판으로 하루를 시작해 ‘문모닝’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점차 안 의원에게 실망했고 2017년 5월 대선은 문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의 선택은 안철수 후보는 물론 박지원과 국민의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 ‘winter is coming’ 2017년 대선 이후 찾아온 암흑기… 국정원장 지명 반전
2017년 5월 대선 이후는 시련의 계절이었다. 2017년 10월 안 의원이 당시 탄핵 사태를 계기로 갈라져 나온 보수 정당인 유승민 전 의원의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면서다. 결국 안 의원을 비롯한 통합파와 박지원을 포함한 호남 의원이 결별하면서 이들은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됐다.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의석수(20석)가 모자랐던 민주평화당은 정의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여야 관계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대선과 그 이후 호남에서 문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문 전 대통령이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남북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자 박지원의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도 비판에서 지지로 선회하게 됐다.
2018년 2월 민평당이 창당된 이후 박지원의 입지도 쪼그라들었다. 민평당이 원내정당이긴 했지만 의정활동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고, 당 대표였던 정동영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의 반목이 심해졌다. 결국 박지원을 포함한 광주·전남 의원 9명은 탈당해 2020년 1월 대안신당을 창당하고 이후 민생당으로 통합됐지만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2020년 7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원장 임명장 수여식. 동아일보 DB
실제 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내정하는 깜짝 인사를 발표했다. 그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에 힘을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문모닝 행보에 대해 ‘후회나 반성을 하느냐’는 질의에 박 후보자는 “치열한 선거 유세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음을 양해해달라”고 답했다.
그해 12월 사석에서 박지원이 한 이야기다.
“내가 호가 단재(旦齋)야. 유명한 한학자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주역을 만든 주공(周公)을 중국 사람들이 존경해서 ‘단(旦)’자를 이름에 잘 안 쓰는데 나에게 그 단자를 지어줘. 주공이 문왕에 이어서 무왕도 엄청 잘 모셔서 중국을 이끌었다. 당시 다 주공이 무왕을 치고 왕이 될 거라 했는데 오히려 무왕을 극진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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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에 대해 DJ에 이어 문 전 대통령, 두 왕을 모시는 것을 예견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라고 답했다.- 취재 메모 중 -
● “정치는 생물… 다음은 나(next is me)”
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지명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임명된 이후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듬해 초부터 코로나19 위기가 찾아왔고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박지원은 국정원 내부에서 여성 간부를 중용했다. 2020년 8월 사상 최초로 여성 차장이 임용됐고 여성 최초 선임 국장도 배출됐다. 정치개입 금지와 대공 수사권 이관을 골자로 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임기 중에 통과시켰고 국정원의 사이버보안 기능과 마약 등 해외 연계 범죄 대응 능력도 강화했다.
구설수도 여전했다.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며 2021년 6월 창설 60주년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원훈을 바꾸고 원훈석을 교체했다. 그런데 원훈석에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쓰였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신 교수는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전력 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직접 써온 그가 원장 취임 뒤에도 미국을 방문해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이 됐다.
재직 당시 벌어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다음 날 국정원 직원들에게 관련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2022년 5월 대선 이후 국정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방송 등에 출연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해 12월 결국 복당해 약 7년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와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정치는 생물’이다. 박지원이 앞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여의도 정치 현장에 복귀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거나 2024년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전남 목포나 고향인 전남 해남·완도·진도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고 총선에서 불출마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엉클 조’라는 친근한 별명이 있는, 동갑내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다음은 나야(next is me)’라고 영어로 말하는 그를 보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물론 그의 ‘안티’들은 “제발 TV 방송 등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테니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게 사라지길 기다리기보다는 현명할 것이다.
박지원 전 원장은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현직 대통령을 붙여 ‘○○○ 대통령을 위하여’를 많이 외칩니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위하여’는 물론 국민의당 시절엔 안철수를 위하여까지 들어봤습니다. 그의 정치엔 기본적으로 나라 걱정과 충성심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DJ 서거 이후엔 그의 충성심도 누구를 향했는지 오락가락하긴 했지요.
한 독자분께서 박 전 원장의 정치관(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정치는 곱하기의 예술, 종합 예술이다. 정치가 제 역할만 해도 경제 사회 문화는 잘 돌아가고 정치가 0이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해도 0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정치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오지 않는다. 타 당이 잘못하면 결국 정치권 전반으로 문제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7화]의 댓글에 많은 누리꾼이 ‘산소 같은 남자’를 O₂가 아닌 tomb(무덤)으로 해석해주셨더군요.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한국 정치에 산소인지 연탄가스인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앞서 서두에 썼던 명리학자가 2021년에 7년간 박 전 원장의 운이 좋다고 했으니 다음 대선까진 운이 좋을까요? 그분이 ‘건진법사’급인지는 다음 대선까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 [19화]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는 미정입니다. 애초에 염두에 뒀던 법조계 원로가 등장하길 원하지 않고 있어 설득 중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