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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달픈 상봉[이준식의 한시 한수]〈213〉

입력 | 2023-05-19 03:00:00


야박한 세태, 사나운 인정, 황혼녘 빗속에 쉬 떨어지는 꽃잎.
새벽바람에 말라버린 눈물, 그 흔적만 남았네요.
시름을 편지로 쓰려다 난간에 기댄 채 내뱉는 혼잣말.
힘들고 힘들고 또 힘들어요!
우린 남남이 되었고, 어제와는 달라진 오늘, 그넷줄처럼 흔들리는 내 병든 영혼.
경보 알리는 싸늘한 호각소리, 밤이 이미 깊었네요.
누가 물어볼까 봐 눈물 삼키고 짐짓 즐거운 척.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춰요!

(世情薄, 人情惡, 雨送黃昏花易落. 曉風乾, 淚痕殘. 欲箋心事, 獨倚斜欄. 難, 難, 難!
人成各, 今非昨, 病魂常似鞦韆索. 角聲寒, 夜闌珊. 怕人尋問, 咽淚裝歡. 瞞, 瞞, 瞞!)

―‘채두봉(釵頭鳳)’·당완(唐琬·1128∼1156)







시인의 첫 남편은 고종사촌인 육유(陸游). 금나라에 중원을 뺏긴 남송 조정에서 주전파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애국 시인이라 칭송받는 그 인물이다. 부부는 금실이 좋았지만 시어머니의 등쌀에 떠밀려 갈라서야 했다. 각자 재혼한 둘은 후일 봄나들이 길에서 우연히 상봉한다. 아내를 내친 죄책감에 시달렸던 육유는 ‘채두봉’이란 곡조에 맞추어 시를 짓는다. ‘마음 가득 시름 안은 채 몇 해나 떨어져 있었던가요. 내 잘못, 다 내 잘못, 내 잘못이지요’라며 울먹였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과 자책이었다. 여자 역시 같은 곡조로 독백처럼 화답한다. 야박한 인정세태는 진즉 경험했지만 오늘처럼 빗줄기가 낙화를 재촉하는 시간 앞에선 더 심란하네요. 글로 쓰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이별의 아픔, 사무치게 용솟는 그리움이 너무 힘들어요. 그런들 무슨 소용 있나요. 눈물도, 상처도 감추고 애써 즐거움을 가장할 수밖에.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