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일주일 전, 콜롬비아의 한 영화감독이 전주 영화제에서 신작을 선보였다. 지인이기도 한 그는 전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며칠 서울에서 머물며 다음 작품의 촬영지를 물색했다. 나는 그 감독과 함께 을지로와 용산, 강남, 종로 등 서울의 여러 동네를 함께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걸었던 지하도와 길거리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인데, 그가 길에서 본 많은 한국인이 옷과는 전혀 상관없는 브랜드,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디스커버리,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텔레비전 채널의 이름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는 거다. 심지어 CNN이라는 브랜드도 보았다고 한다. 앞의 두 방송국은 해외에서의 활동이나 모험과 관련이 있어 아웃도어과 연계되었다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CNN은 어떤 이유로 의류 브랜드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나와 함께 있던 영화감독도 비슷한 함정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대화를 한 며칠 후, 밖으로 갈 채비를 하기 위해 그는 전주에서 산 재킷을 입었는데 그 재킷의 브랜드는 코닥이었다. 그의 얘기론 영화제 기간 많은 외국인 동료들이 필름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옷을 파는 상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열광했다고 한다. 코닥은 2012년 파산했지만 최근 들어 코다크롬 필름이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스 출신의 한 영화감독은 모자, 여행 가방, 재킷, 열쇠고리까지 구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제품들이 파리에서 유행하고 있어서 프랑스에 가면 두세 배의 가격으로 쉽게 팔 수 있다 했다고 한다. 굳이 팔지 않고 직접 쓰더라도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가는 멋쟁이가 될 거라고도 했단다.
내가 본 대부분의 한국인은 무채색에 고전적인 컷의 옷을 주로 입는데, 패션 용어로는 놈코어(Normcore)라고 한다. 내 눈에는 무척 지루한 스타일이다. 값이 아주 비싼 브랜드를 입더라도 기본적인 것을 선호하므로 디자이너의 세계에서는 한국을 두고 ‘조용한 럭셔리’라 부른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백화점마다 구찌와 발렌시아가 매장이 있다. 한국인의 일반적인 취향과는 정반대로 보이는데 대체 누가 사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한국에는 발렌시아가 스타일의 화려한 디자인을 추구하면서도 백화점의 명품 상점이 아닌 저렴한 시장에서 옷을 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색상과 패턴, 소재를 자유자재로 조합하는 어르신들이다. 물론 그분들로서는 패션의 측면에서 생각하기보다 실용적이고 저렴한 옷들을 사 입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아방가르드 패션 스타일리스트들이 한국에 방문해서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이분들의 패션 아이디어에 영감받아 컬렉션을 준비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대담하다. 후드가 달린 정장 재킷이나, 셔츠와 넥타이 위에 등산용 조끼를 입는 중년 남성들은 프라다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모두 자본주의가 방출하는 에너지의 산물로 동양과 서양 사이의 신비한 회전문이다.
얼마 전, 사진작가 김동현은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MUT’라는 제목의 사진집이다. 이 책은 동묘 거리를 산책하는 60대 이상 남녀의 초상으로 채워져 있다. ‘놈코어’에서 벗어난 이들의 패션을 보면, 아침에 그날 어떻게 옷을 입을지 깊게 고민하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이들이 걸친 장신구나 모자가 분명히 말해주는 건 이들은 패션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랜드, 트렌드, 가격, 디자이너를 뛰어넘는 자연스럽고도 경이로운 패션 감각을 가진 분들이다. 일상적인 패션에 지루함을 느끼는 한국인들에게 권한다. 김동현 작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mut…jpg)을 방문하면 한국에도 놈코어와 단조로운 럭셔리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