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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용 캐리어로 옮겨진 다빈치 작품의 사연[영감 한 스푼]

입력 | 2023-05-20 11:00:00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화 ‘지네브라 데 벤치’. 워싱턴=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미술관을 둘러보던 중 유난히 관객이 많은 방을 발견했는데요. 그곳 한 가운데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가 별도의 유리장에 전시되어 앞 뒷면을 모두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공개적으로 전시된 유일한 다빈치의 그림입니다. 즉 미국에서 다빈치를 보려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린다는 이야기죠. 어떤 작품이고 또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들려드리겠습니다.


문밖 자연으로 나온 여인

이 작품은 그려진 당시의 관점에서 두 가지 차별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옆모습이 아닌 측면을 비스듬히 보고 있는 여인의 자세이고, 두 번째는 그 배경이 실내가 아닌 야외라는 점입니다.

이때 보통 초상화는 완전히 측면에서 본 것이 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치 인물이 내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더 극명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이 혼자 외출하는 것이 드문 시기였는데, 드넓은 자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가 됐죠. 도대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길래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림 속 여인은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의 딸 지네브라 데 벤치(1457~1521)로 추정됩니다. 이 그림은 그녀가 16세일 무렵 그려졌고, 당시 다빈치는 22세였습니다. 다빈치 역시 아직 젊은, 베로키오 공방의 조수이자 견습생에서 별도의 주문을 받기 시작할 때였죠. 그럼에도 입체적인 얼굴과 머리칼, 또 나무와 자연의 사실적 묘사가 다빈치 특유의 기교를 보여줍니다.

그럼 다빈치는 왜 지네브라의 초상을 그렸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화가는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 역시 인생의 특별한 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 주문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생일이나 졸업, 결혼 등 중요한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 그림은 지네브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긴 ‘셀피’와도 같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지네브라의 약혼을 축하하며 그려졌습니다. 지네브라의 곱슬머리 뒤로 펼쳐진 나무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요. 당시 여성의 미덕을 상징했으며, 지네브라의 이름과도 발음이 비슷한 향나무(juniper)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 뒷면  

이 그림의 뒷면에는 ‘아름다움이 미덕을 빛낸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덕을 갖춘 지네브라가 아름답기까지 해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를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는 월계수와 종려나무인데요. 이 두 나무는 당시 피렌체 주재 베네치아 외교관인 베르나르도 벰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데 벤치와 벰보가 시를 편지로 주고받은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이에 따라 그림 속에는 두 사람의 우정도 담겨 있다고 연구자들은 봅니다. 데 벤치에 대한 애정으로 그림을 다 빈치에게 의뢰한 사람이 벰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즉 아름답고 지적인 데 벤치의 약혼을 축하하는 외교관의 선물이었던 것이죠. 다 빈치는 그런 그녀의 지성을 과감한 구도와 풍경으로 돋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행 가방으로 실어 온 작품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워싱턴=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미국으로 오게 되기까지의 스토리입니다.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이 2018년 현지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미술관이 1967년 구매해 무려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캐리어에 담아 가져왔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 이유는 작품을 최대한 조용히 가져오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원래 유럽 리히텐슈타인의 왕족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빈치의 작품, 특히 유화는 세계적으로 몇 점 없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발견된 ‘살바토르 문디’가 2017년 경매에서 5000억 원에 팔려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살바토르 문디’

내셔널 갤러리는 이 작품을 약 500만 달러(약 60억 원)에 구매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정난을 맞이했던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빈치의 그림을 팔았다고 하네요. 오랫동안 이 작품에 눈독을 들였던 내셔널갤러리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왕족이 돈이 부족해 판 그림을 떠들썩하게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캐리어에 담아 비행기로 가져옵니다. 물론 화물칸에 싣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캐리어를 위한 별도의 비행가 좌석을 구매했고, 그 옆을 큐레이터가 지키며 그림을 조용히 모셔 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때 미술관의 결정은 다빈치를 보기 위해 수백만 명의 관객이 찾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술관을 짓는 것은 쉽지만, 좋은 소장품과 전시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은 단시간에 이뤄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싶을까? 그것을 걸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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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