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0대 국악인 차다율 씨 (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국악인 차다율 씨가 2017년 한 국악 공연에서 찍은 사진. 차 씨는 경기민요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발탈’ 전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제공 차다율 씨
사람은 어디서 나고 자랄까. 종교적 철학적 설명이야 끝이 없겠지만, 누구나 하나의 분명한 공통점은 있다. 모두가 부모의 유전자를 받아 엄마 뱃속에서 생명이 영근다.
국가무형문화재 ‘발탈(발에 가면을 씌워 연희하는 탈놀이)’ 전수자인 차다율 씨(29)는 그런 뜻에서 몸에 국악이란 DNA가 애초부터 새겨진 청년이다. 어머니인 이영미 씨가 한국국악협회 군포시지부장을 지냈던 소리꾼으로, 그에게 국악은 ‘밥상의 김치’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였다. 대학에서 민요를 전공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네…,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이런 자리가 너무 긴장되네요. 현재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의 전승기획팀에서 주임으로 일하는 차다율이라고 합니다. 소속이 좀 긴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무형문화재 관련 활성화 사업이나 해외 홍보 등을 담당하고 있어요. 이건 직장이고, 저란 사람은…민요, 국악 하는 사람이라고 봐주시면 될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영향을 받아 민요나 사물놀이를 가까이했고, 전공도 그렇고요. 현재는 탈놀이의 일종인 발탈 전수자 과정을 밟고 있어요.”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만난 차다율 씨는 재단의 전승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무대에 오르지 않은 그의 편안한 차림은 영락없는 20대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뇨, 그렇진 않아요. 군포에 있는 수리고를 나왔어요. 아, 저희 선배 중에 엄청 자랑스러운 분이 계셔요. 김연아 선수! 직접 뵌 적은 없지만, 호호. 어머니가 경기민요를 하셔서 자연스레 어깨 너머로 익혔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고1 때였어요. 음악 수업 때 진도아리랑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노래하는 걸 들으시더니 ‘너 어디서 배웠나’ 하시더군요. 생각해보니 저한텐 집안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던 거라 ‘그럼 한번 제대로 해볼까’ 마음먹게 됐죠.”
-어머니 반응은 어떠셨습니까.
“제일 좋아하셨죠! 딸 둘인데 언니는 아빠를 닮아 이과 스타일이고 저도 인문계였으니, 내색은 안 하셔도 살짝 아쉬우셨나 봐요. 해보겠단 의사를 밝히니 바로 민요 선생님에게 데려가서 테스트 같은 걸 했는데, ‘싹수가 보인다’ 하셔서 엄청 기뻐하셨어요. 그때부터 엄마는 언제나 저의 제일가는 선생님이자 매니저이자 후원자셨어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는 거죠.”
-비교적 늦게 시작한 편인 거죠?
“남들보다 많이 뒤처졌죠. 천차만별이긴 한데, 제 대학(중앙대 전통예술학부) 동기들 보면 정말 아기 때부터 시작한 친구들도 꽤 있거든요. 늦어도 중학교 때쯤엔 본격적으로 국악 공부를 한 애들이 대부분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친숙했다고 해도, 고교 전까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미친 듯이 열심히 했어요! 고3 때는 아예 가요나 팝송은 듣지도 않았죠. 1년 내내 민요만 듣고 따라 부르고….”
“맞아요. 저희 학교에서 민요 하는 학생은 저뿐이었죠. 그래도 예체능계 반이 따로 있어서, 학교에서 융통성 있게 배려해주신 덕이 컸어요. 경북 영천아리랑 민요제 등 전국에서 열리는 대회들도 열심히 나갔고요. 실은 장려상이 제일 좋은 성적이라 입상 경력으로 대학 가긴 어려웠어요. 그래도 실기시험 때 가능성을 잘 봐주신 덕분인지, 제 마음속에 언제나 0순위였던 중앙대에 붙었어요. 처음 합격 소식 들었을 때 옆에 있던 친구랑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기념해 열린 ‘희망다리문화토크콘서트’ 무대에서 공연하는 차다율 씨. 사진제공 차다율 씨
“제가 13학번인데 입학해보니 부족한 게 정말 많다는 걸 느꼈어요. 확실히 오래 해온 친구들보다 이론도 딸리고 전체적인 이해도도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도 지금도, 저의 가장 큰 무기는 ‘성실함’이거든요! 정말 열심히 배웠어요. 뭔가 주어지면 절대 빼지 않고 일단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는 편이기도 하고요. 시작은 늦었지만 열정은 뒤지지 않았다고 자신합니다. 이건 너무 자랑 같긴 하지만, 졸업할 때 성적도 차석이었어요.”
-첫 직장으로 연예기획사를 택한 것도 도전 의식이었나요.
“음…, 반반인 것 같아요. 국악이 너무 좋고 무대에 오르는 것도 너무 좋은데, 아시겠지만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어렵잖아요.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두려움에 고민이 많았죠. 근데 4학년 때 뮤직비즈니스 수업을 들었는데, 그게 너무 흥미로운 거예요. 마침 담당 교수님이 그쪽 업계에 발이 넓으신 분인데, 저를 한 회사에 추천해 주셨어요. 대형기획사는 아니지만, 유명 아이돌도 소속된 회사라 저도 ‘한번 해보자’ 싶었고요. 다행히 회사에서도 좋게 봐주셔서 2017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한 거죠.”
-민요 하던 사람이 대중가요란 다른 분야로 간 거네요.
“네, 그러니 처음엔 얼마나 낯설고 정신없었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죠. 큰 회사가 아니라서 앨범 기획부터 아티스트 스케줄 관리까지 모든 일에 다 투입돼서 일했어요. 그래도 그쪽 일은 뭔가를 하면 바로바로 성과가 나오고 팬들 반응도 즉각적이라 좋았어요.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도 컸고요. 다만 거의 매일 야근을 하다보니 체력적으로 너무 버거웠어요. 사무실이 홍대 쪽인데 군포에서 출퇴근하기도 힘들었고요. 게다가 초반엔 크게 맘에 두지 않았지만, 연봉이 박한 것도 갈수록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죠.”
2020년 12월 경기민요 국악인인 어머니 이영미 씨의 공연에서 찍은 사진. 차다율 씨에게 어머니는 자신을 국악의 세계로 이끈 나침반이자, 지금까지 국악과 함께 할 수 있게 해준 주춧돌이다. 사진제공 차다율 씨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한데…, 첫 월급은 수습 3개월이 적용돼 70만 원 정도였어요.”
“처음엔 그런 생각도 못 했어요. 그냥 너무 기뻤어요. 대학 내내 카페 등에서 알바를 하긴 했지만, 정식으로 취직해서 번 돈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일도 재밌으니까 앞으로 나아질 거란 기대도 있었고요. 하지만 수습이 끝나도 그리 월급이 드라마틱하게 오르진 않더라고요. 거의 휴일도 없이 매일 야근하는 상황이 갈수록 견디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입사 1년 동안은 휴가를 쓸 수 없다는 내부규정까지 있었어요. 출퇴근 시간이라도 줄여보려고 홍대 쪽 자취방도 알아봤는데, 거기에 월급을 다 쏟아부을 판이라 포기했죠. 결국 반년 정도 다니다가 관두게 됐어요.”
-요즘 말마따나 ‘열정페이’네요.
“네, 그런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한동안 방황하는 시기를 겪기도 했어요. 난 뭘 해야 하나 싶었죠. 그래서 회사 다닐 때부터 맘속에 있던 생각을 실천하기로 했어요. ‘내 걸 하자. 내 것은 뭘까. 국악이고 민요다. 언제나 내가 돌아갈 고향이니까.’ 그때 대학 다니며 지역아동센터 같은 데서 민요를 가르치며 장학금을 받았던 기억이 났어요. 그걸 다시 해보기로 했죠. 근데 그것도 쉽진 않았어요. 보람은 크지만 역시 알바 수준이라 생계를 꾸릴 정도는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계속 국악 관련 일을 검색하다가, 국악 전공자인 여객선 승무원을 뽑는다는 공고문을 보게 된 거죠.”
-대형크루즈 같은 건가 보죠? 선상 공연도 하는.
“비슷한 거예요.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호예요. 배 아래는 화물을 싣고 가고, 위에는 여객선으로 된 구조예요. 객실이나 식당은 물론 카페 편의점 면세점 등도 다 있고요.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고, 흔히 ‘따이공(중국 보따리상)’이라고 불리는 승객들도 많았어요. 회사 측에선 만찬장 무대에서 국악 공연을 할 수 있는 이를 찾고 있었대요. 다만 공연만 하는 국악인을 뽑으려는 건 아니고,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공연도 소화할 수 있는 이를 원했던 거죠.”
차다율 씨가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크루즈에서 일할 당시 배 위에서 찍은 사진. 20대 승무원의 생기발랄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진제공 차다율 씨
“에구, 별말씀을요. 면접을 봤더니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저로서도 원래부터 배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비행기는 아니지만 스튜어디스란 직업도 근사해 보여서 기대가 됐죠. 뭣보다 이전에 받던 월급보다 훨씬 많아서…, 하하.”
-직장인에게 연봉은 중요하죠.
“말씀드렸지만, 전 70만 원 받고도 되게 행복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여긴 월 270 전후에 추가 수당도 있고, 매장에서 수익이 잘 나오면 그것도 일부는 성과급으로 나눠주는 거예요. 한 달에 300 이상 고정적으로 벌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근데…, 세상에 쉽게 버는 돈은 어디에도 없더라고요.”
-업무가 상당했나 봅니다.
“한 번 승선하면 승객이 300~400명 정도 되는데, 승무원은 남자 대여섯 분 포함해서 15명 정도뿐이거든요. 단순히 고객 응대만 하는 게 아니라, 카페든 면세점이든 일손 부족한 곳이면 다 투입되는 시스템이에요. 저는 주로 식당 쪽 일을 주로 했는데, 일도 일이지만 중국인 승객들하고 말이 안 통하는 게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다소 거친 분들도 적지 않았고요.”
-선상 공연은 어땠나요.
“기대와 달리 공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냥 승무원으로 일하는 거였죠. 주 6일 근무 체재인데 거의 쉴 틈 없이 돌아갔어요. 하지만…, 진짜 힘든 건 노동 강도가 아니었어요. 어디나 그렇지만, 직장인 고충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거기서 결국 1년밖에 버티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어요.”
(하편에서 계속)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차다율 씨가 보내준 첫 번째 사진은 고향인 경기 용인에서 서너살 때쯤 찍은 거라고 합니다. 왼쪽에 있는 언니와 함께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어여쁜 중국 인형을 연상케 하네요. 이 사진을 찍고 계셨던 부모님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걸리지 않았을까요. 사진제공 차다율 씨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