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총선 시즌이 다가오긴 했나 봅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요즘 여의도에는 출마 예정자들의 지역사무소 개소식 초대장이 쏟아집니다. 내가 이 지역구에서 뛰겠다고 알리는 예고편이죠. 그중에서도 요즘 더불어민주당에선 지난 총선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온 의원들의 ‘지역구 사냥’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경기 남양주을
지난 14일 민주당 경기 남양주을 지역위원회 소속 시·도의원 7명은 ‘명분 없고 지역민을 무시한 김병주 의원의 남양주을 출마 선언’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비례대표인 김병주 의원의 남양주을 출마를 공개 반대했습니다. 남양주와 아무 연고도 없는데 왜 나오냐는 거죠. 경북 예천이 고향인 김 의원은 강원 강릉고 출신으로 지난 총선 때 강원권역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뛰었고, 현재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살고 있습니다. 육군 장성 출신인 김 의원은 “육사 생도 시절 남양주 별내로 행군을 자주 했다. 현재 사는 공릉동도 남양주와 가깝다”라고 출마 사유를 밝힌 바 있습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2020년 3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번이었던 김병주 의원(가운데)이 당시 송기헌 강원 원주을 후보(현 의원), 이광재 강원 원주갑 후보(현 국회 사무총장)과 함께 원주 공동 공약 발표회에 참석해 웃고 있다. 김 의원은 강릉고를 졸업했으며, 총선 당시 강원권역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뛰었다. 이광재 페이스북
올해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경기 파주 소재 방공부대를 방문한 이재명 대표와 김병주 의원(오른쪽 두 번째). 비례대표 출신인 김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경기 남양주을 출마를 최근 공식화했다. 김병주 의원 페이스북
경기 광명을
경기 광명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이자 재생에너지 전문가로 국회에 입성한 비례대표 양이원영 의원은 다음 달 3일 광명에 지역사무소를 연다고 밝혔습니다. 광명을은 광명시장 출신인 민주당 양기대 의원의 지역구죠. 양이 의원은 지난 1월 설 명절을 앞두고 양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출마 계획을 전했다고 합니다.양이 의원은 울산 출신으로,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기현 대표의 울산 KTX 역세권 개발 특혜 의혹을 앞장서서 제기했었죠. 양이 의원이 그동안 원전 전문가라고 스스로 홍보했던 만큼 원전이 몰려있는 울산으로 출마했더라면 출마 명분이 더 확실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울산이 민주당엔 험지이니 아무래도 가시밭길은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네요. 광명시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52.50%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44.20%)를 크게 앞섰던 곳입니다.
양이 의원은 강경파 초선 의원 모임인 ‘처럼회’ 소속으로 강성 친명으로 분류되죠. 양이 의원은 14일 민주당 쇄신 의원총회에서 이재명 대표의 재신임을 요구했던 비명계 양기대 의원을 향해 다음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그동안 무슨 일을 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오히려 본인들이 당원들에게 재신임받아야 하는 상황 아닌가요?”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양이원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쇄신 의원총회 다음날인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의총에서 이재명 대표 재신임을 요구한 양기대 의원 등 비명계 의원들을 겨냥해 올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양이원영 페이스북
전북 군산
역시 처럼회 소속 김의겸 의원도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내년 총선에 고향인 군산에서 출마하겠다”라며 군산 출마를 공식화했습니다. 군산은 민주당 비명계 신영대 의원의 지역구입니다. 김 의원은 지난 총선 때도 군산으로 출마하려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당 후보로 아예 출마를 못 했습니다. 이후 열린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열린민주당이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 소속 비례대표가 된 케이스입니다.부동산 투기 논란 속에 21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했던 김의겸 의원이 2020년 2월 신영대 의원(당시 후보)을 찾아 지원을 약속했다. 김 의원은 이후 한 달 만에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신영대 의원 페이스북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지난해 5월 제주도의회에서 “언제나 제주도민만을 생각하겠다”라며 제주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알리는 모습. 결국 당시 제주을 보궐선거에는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이 전략 공천돼 당선됐다. 제이누리
한 중진 의원은 “비례대표는 어쨌든 당의 배려를 받아 국회에 입성한 것 아니냐. 그러면 다음 총선 때는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험지에 도전하거나, 국민의힘 지역구에 출마해야지, 어떻게 민주당 현직 의원들의 수도권 지역구에 줄줄이 나가나”라고 혀를 찼습니다. 국민의힘 현역 의원 지역구를 빼앗아 와도 모자랄 판에 왜 제 살 깎아먹기하듯 민주당 지역구에서 싸우냐는 거죠.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서로 ‘디스전’을 벌이면 결과적으로 국민의힘만 좋은 일 시키는 꼴이라는 겁니다.
이번에 유독 현역 의원 지역구에 도전장을 던지는 비례대표가 많은 것을 두고 당 지도부의 리더십 상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한 재선 의원은 “원래 당이 비례대표들의 출마 지역이 서로 꼬이지 않게 교통정리를 당연히 해주는 게 맞다. 그런데 지금 지도부는 당 대표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기 바빠서인지 각자도생식으로 내버려 두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마침 위 사례들의 공통점은 ‘이재명 측근’ 타이틀을 내건 친명 후보들이, 민주당이 우세한 텃밭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비명 또는 계파색이 옅은 현역 의원들의 지역구에 도전장을 냈다는 거죠. 차라리 이들이 강성 친명 의원 지역구에도 도전장을 냈더라면 잡음이 좀 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명분’이라고들 하죠. 내가 왜 이 선거에 나오려고 하는지, 나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을 때 그 자체가 원동력이 돼서 승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최측근들조차 격하게 말렸던 이유가 출마에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꼬리표가 지금까지도 그를 따라다닌다는 점을 비례대표 의원들도 잘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현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