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인류를 멸망시킬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띄면 우리는 일단 달려든다. 기술이 성공한 뒤에야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따져본다”고 하던 그는 원폭실험에서 죽음의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트루먼 정부에 원자폭탄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미국 의회에서 인공지능(AI)에 대한 규제를 촉구했다는 소식에 오펜하이머가 떠올랐다. 올트먼 CEO는 “점점 강력해지는 AI의 위험을 줄이려면 정부 개입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같은 국제기구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결과물이 상업적,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 가치중립적일 수만은 없다. 자신의 창조물이 인류의 보편가치를 뒤흔들지 못하게 규제해 달라고 한 점에서 두 사람은 같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오펜하이머와 달리 올트먼은 AI가 미국 정부의 핵심 전략자산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알았다. 그는 백악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민관합동 AI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등 빅테크 거물들도 동행했다.
미국이 전의를 불태우는 상대는 역시 중국이다. 중국의 AI 기술은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미지 인식 같은 특정 분야에서는 이미 미국을 능가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은 이런 중국의 AI 굴기를 막기 위해 각종 규제를 동원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서 생산한 AI용 고성능 반도체를 수입할 수 없다. 미국 자본은 중국 AI 기업에 투자하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오픈AI의 올트먼이 AI 규제의 필요성, 특히 국제적 제재의 필요성을 언급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역시 중국의 AI 굴기를 겨냥한 조치로 읽힐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이 없던 곳에 새로 룰이 만들어지는 것은 후발주자에게는 새로운 장벽이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규제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후발주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 후발주자 무리에 중국뿐 아니라 우리도 포함돼 있다.
AI 업계에선 “한국이 AI 산업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할 시간이 3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여러 규제가 이 촉박한 시간에 우리 자체 기술 개발 기회를 축소하거나 박탈하지 않도록 룰 메이커로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시점이다.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후발주자의 숙명이다.
김현지 미래전략연구소 사업전략팀장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