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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 ‘그림자 통치’에 퇴행하는 태국 민주주의[글로벌 이슈/하정민]

입력 | 2023-05-24 03:00:00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한 후 해외를 떠돌고 있는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2019년 7월 홍콩에서 열린 딸 패통탄의 결혼식장에서 웃고 있다. 2001년 그가 집권한 후 탁신 일가가 만든 정당은 모든 총선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14일 총선에서 패통탄이 이끄는 프아타이당은 진보 전진당에 밀려 2위로 처졌다. 무상 의료 등 현금 살포 정책으로 ‘빈민의 영웅’으로 불렸던 탁신 전 총리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 나온다. 홍콩=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2001년 “태국의 마약, 빈곤, 가뭄을 없애겠다”며 집권했다. 30밧(약 1140원) 의료제, 마을당 100만 밧 지급, 농가 부채 탕감 등 현금을 직접 뿌리는 선심성 복지 정책을 폈다. 약 7000만 명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농민과 빈민층이 열광했다. 금기로 여겨지던 왕실과 군부도 서슴지 않고 비판했다. 종신 집권이 가능하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8명의 형제자매, 처가 식구 등이 기간 산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가문 소유의 통신사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19억 달러(약 2조5000억 원)에 팔면서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냈다. 반대파와 시민단체 또한 탄압하자 민심이 돌아섰다.

2006년 미국 방문 중 쿠데타가 발생해 실각했다. 이후 17년 넘게 해외를 떠돌면서도 여동생 잉락, 딸 패통탄 등을 내세워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논쟁적 정치인’으로 꼽히는 화교계 통신 재벌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다.

그의 등장 후 태국은 탁신 대 반(反)탁신으로 나뉘어 20년 넘게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0년에는 수도 방콕 한복판에서 농민 등 친탁신파가 많은 ‘레드 셔츠’와 군부, 부유층이 중심인 반탁신파 ‘옐로 셔츠’가 두 달간 유혈 충돌을 벌여 100여 명이 숨졌다. 각각 노동자와 왕을 상징하는 빨강, 노랑 옷을 입고 대결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민주주의 선거가 본질적으로 ‘쪽수 대결’이란 점도 그를 둘러싼 혼란을 고조시켰다. “부패와 독재가 있다지만 서민을 사람 취급한 유일한 정치인”이라며 그에게 몰표를 던지는 국민이 최소 절반이다. 그의 실각 후에도 탁신 일가가 만든 정당이 늘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비결이다. 잉락 또한 오빠의 뒤를 이어 2011∼2014년 총리를 지냈다. 오빠처럼 정부가 농가의 쌀을 국제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사주는 ‘쌀 수매제’ 등의 선심성 복지 정책으로 국가 재정에 부담을 안겼다.

이런 상황에서 패통탄이 이끄는 프아타이당이 14일 총선에서 ‘1위’가 아닌 ‘2위’로 밀린 건 상당한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부친의 노선을 계승한 패통탄 또한 이번 선거 전 “모든 성인에게 1만 밧 지급” 등 익숙한 현금 살포 공약을 내놨다. 그럼에도 탁신의 고향 치앙마이, 저소득층이 많은 방콕 등에서도 부진했다. 탁신과 군부의 오랜 대립, 지지부진한 경제 등에 지친 2030 유권자는 군주제 개혁, 징병제 폐지 등을 외친 신생 정당 전진당을 1위로 만들어줬다.

문제는 전진당이 연정 구성에 난항을 겪고 있는 데다 ‘수권’이 목표인 패통탄 또한 ‘부친 사면’을 조건으로 오랫동안 척을 졌던 군부와 손잡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군부 또한 겉으로는 탁신에게 이를 갈지만 이번 총선에서 군부 지도자가 만든 2개 정당이 각각 4, 5위에 그친 터라 누구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 “군부, 탁신, 왕실이 다 싫다”는 전진당보다는 차라리 ‘익숙한 적’ 탁신이 나을 수도 있다. 둘 다 부정부패에선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탁신 전 총리 또한 만족스럽지 못한 선거 결과, 귀국 후 투옥 위험 등을 감수하고라도 귀국하겠다며 정계 복귀 의지를 다졌다. 그는 16일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를 통해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7월에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은 왕실에 충성하며 전진당의 반군주제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치가 생물(生物)임을 감안하면 탁신과 군부가 ‘왕실 지지’를 매개로 불안한 동거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집권 내내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으로 일관한 탁신의 귀국과 복귀 시도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10월 세계은행은 불평등의 대표적 척도인 태국의 지니계수가 0.433으로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5∼7%대 성장을 구가하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과 달리 태국의 성장률 또한 수년째 2∼3%대에 그친다.

이는 많은 국민이 탁신 일가의 선심성 복지 정책의 단맛에 익숙해진 탓에 농업 등 핵심 산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고 고부가가치 제품은 생산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부 공(功)이 있다지만 포퓰리즘 정책 남발, 부패, 분열 조장만으로도 탁신 전 총리의 과(過)가 적지 않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