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순덕 칼럼]6·25 종군 여기자의 외침 “한국은 자명종이다”

입력 | 2023-05-25 00:00:00

1951년 첫 여성 퓰리처 수상자 히긴스
“전쟁 덕에 미군 약체 알려져 철저히 무장”
지금도 한국은 전체주의·북핵에 맞서
자유세계 시민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



마거릿 히긴스 6·25전쟁 종군기자. 동아일보DB


이달 초 발표된 2023년 퓰리처상은 단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보도에 모아졌다.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AP 사진팀이 대상 격인 공공서비스 부문상을 수상했다. 뉴욕타임스는 부차에서 자행된 러시아 공수부대의 ‘전쟁 범죄’를 파헤쳐 국제보도상을 받았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퓰리처상의 관심은 한반도였다. 국제보도상 수상자 여섯 명 모두 한국전쟁을 보도한 기자들이다. 그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 마거릿 히긴스는 6·25 발발 이틀 후 서울로 날아와 한강철교 폭파부터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철수 등 숱한 특종 기사를 쓴 당시 31세의 유일한 종군 여기자이자 첫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였다.

그가 1951년 초 출판한 한국전쟁 르포 ‘War in Korea’가 2009년에 이어 올해 다시 번역돼 나왔다. 1951년 ‘한국은 세계의 잠을 깨웠다’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으로, 최근엔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은 의미심장하다. 히긴스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7차례나 한국을 오가며 만났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등의 인터뷰가 덧붙여지면서 제목이 달라진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선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히긴스의 책을 보면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는 데 새삼 가슴을 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방미 때 미 의회 연설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자식과 남편, 그리고 형제를 태평양 너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보내준 미국의 어머니들과…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미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썼다.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편히 지내다 한국에 파견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대원 다수가 총기 조립조차 할 줄 모르고 애꿎게 죽어갔다. 희망 없는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정부를 저주하며 무기를 버리는 것도 봤다고 했다.

히긴스는 ‘반역자’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런 현장을 기사로 써 보냈다. 그래야 병력과 무기가 신속히 지원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라진 것은 군기가 살아나면서부터였다. 7월 29일 미8군 월턴 워커 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라”는 사수 명령을 내리면서 전선은 지켜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히긴스가 알려주는 두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자와의 타협은 무용지물이고 국익은 냉정하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히긴스와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속임수라는 것을 미국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건 지금도 유효하다.

북한과의 핵 폐기 협상 30년이 결국 사기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좌파 정권들이 모르고 당했는지, 알고도 속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중국이 잘살게 되면 민주화할 것이라고 미국은 믿고 싶었겠지만 틀렸다.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트루먼은 6·25 때 적을 완전 소탕하는 것을 금했고, 그리하여 중국에 패배를 안길 기회와 한국 주도의 통일을 놓치게 했다. 그렇다면 북핵 위협에 노출된 현재, 우리는 일본 같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못 하고 마냥 미국만 바라봐도 괜찮은가.

히긴스가 남긴 세 번째 교훈은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세계인을 잠에서 깨우는 국제적인 자명종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나라는 핵을 지닌 북한과 머리를 맞대고 자유세계와 전체주의세계를 각각 대표하는 체제로서 자유시민을 일깨우는 자명종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여 년 전에는 소련이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 공산당이 세계 지배를 노리고 있다.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믿는 시대착오적 세력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좋든 싫든 참 독특한 K-모델이다. 군기가 살아나자 6·25 때 미군은 일어났다. 시민정신이든 용기든 애국심이든 북이 도발할 경우 무기를 들고 나설 결기든, 우리 국민의 정신이 살아나야 자명종도 울릴 수 있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