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 매장을 찾은 손님이 ‘폐업’ 간판 아래를 지나고 있다. 한때 가정용품 분야 선두 유통업체로 꼽힌 BB&B는 지난달 재정난으로 파산을 신청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21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州)에 있는 대형 쇼핑몰 건너편 가정용품 전문점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 블록 하나를 온전히 차지할 만큼 큰 단독 매장인 이곳은 주말인데도 그 앞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같은 날 버지니아의 또 다른 BB&B 매장은 손님들이 분주하게 진열대 사이를 오갔다. 지난달 23일 재정난에 빠진 BB&B가 파산을 신청한 이후 미 전역 매장들이 대거 폐업하는 가운데 일부 문을 열고 할인 판매를 하는 매장에는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이 매장에서 만난 루나 씨는 “어릴 때부터 BB&B 제품을 써왔는데 곧 문을 닫는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두고두고 쓸 물품을 사려고 왔는데 사고 싶은 것들이 다 팔려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BB&B는 한때 미 전역에 매장 1500여 곳을 거느리던 가정용품 유통업체 선두 주자였다. 1971년 뉴저지주에서 처음 문을 연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거듭했다. BB&B는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처럼 분야를 망라해 각양각색 제품을 판매하는 것과는 달리 가정용품에만 집중하는 이른바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 영역을 개척한 기업으로 꼽혔다.
쿠폰을 활용한 공격적인 할인으로 2018년 매출 120억 달러(약 16조 원)를 넘어선 이 유통업계 공룡을 무너뜨린 결정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온라인 쇼핑 확산으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와중에 팬데믹이 닥치며 급격한 재정 위기를 맞았다. 경기 침체 우려가 확산되면서 미국에서 파산하는 기업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10∼2011년 유럽 재정위기 이후 최다 수준으로 치솟는 가운데 아마존을 비롯한 온라인 유통업계로의 쏠림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카테고리 킬러’ 전성시대의 끝
21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 다른 매장. 올 2월 폐업한 이후 새 주인을 찾지 못한 건물이 방치돼 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온라인 쇼핑몰이 본격적으로 세(勢)를 넓히기 시작하자 BB&B 같은 카테고리 킬러의 수익성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마존 같은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으로 대량 구매를 통한 가격 경쟁력이 사라진 것이다. 온라인 쇼핑몰이 점점 대형화해 직접 매장을 방문하지 않고도 싼 가격에 더 많은 제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카테고리 킬러가 설 자리를 잃게 됐다는 분석이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가 등장하면서 미 전역에 약 3000개 매장을 두고 있던 비디오 대여 전문점 블록버스터가 파산한 데 이어 2015년에는 가전 유통업계를 주름잡던 라디오섁(RadioShack)이 뒤를 이었다. 2017년에는 전 세계 최대 장난감 판매점 토이저러스가 막대한 부채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했다.
카테고리 킬러의 잇단 파산에도 강도 높은 자구책을 단행하며 명맥을 이어가던 BB&B가 결국 더 버티지 못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이 컸다. 온라인 쇼핑 같은 파괴적 혁신에 적응하지 못한 가운데 중국의 엄격한 코로나19 폐쇄 조치와 수송 대란 등으로 인한 공급난에 쇼핑객까지 감소하면서 막대한 적자가 쌓였다. 올 1월 파티용품 업계 선두 주자 파티시티도 파산을 신청했다.
아직 남아 있는 카테고리 킬러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미 최대 서점 체인 반스앤드노블도 올해 150여 개 매장을 폐쇄하기로 했고 사무용품 업체 스테이플스 역시 지속적으로 매장을 줄이고 있다.
美 기업 파산 10년 만에 최다
BB&B를 비롯한 카테고리 킬러 몰락의 최대 수혜자는 온라인 쇼핑 공룡 아마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온라인 쇼핑으로의 고객 이동에 발 빠르게 대처한 대형 유통업체 타겟과 월마트, 할인점 TJ맥스 등도 혜택을 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유통 분석업체 뉴머레이터 조사에 따르면 BB&B에서 제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는 쇼핑객의 68%는 대체 상품을 구입할 곳으로 아마존을 꼽았다. 미 온라인 쇼핑 전체 매출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아마존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올 1분기(1∼3월) 아마존 매출은 1274억 달러(약 170조 원)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9% 증가했다.카테고리 킬러가 잇달아 파산하면서 미 소비시장 위축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컨설팅업체 칸타의 데이브 마코테 수석 부사장은 CNN에 “문 닫는 업체들 매출이 모두 경쟁업체에 흡수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돈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상무부가 16일 발표한 4월 소비지표에 따르면 미 소매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4% 증가했지만 시장 전망치 절반 수준에 그쳤다. 특히 외식 음료 건강 같은 이른바 재량 지출 소비는 확연한 둔화세를 보였다. 이 와중에 올 1분기 파산을 신청한 기업은 236개사로 글로벌 경기 침체가 한창이던 2010년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일각에선 BB&B를 비롯한 카테고리 킬러 연쇄 파산이 미 상업부동산 시장 침체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파산 위기에 처한 미 지역은행들이 대출을 조이고 있는 가운데 재택근무 확산과 소비 둔화로 인한 상업부동산 시장 붕괴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대체투자 플랫폼 일드스트리트의 미치 로젠 부동산 담당 이사는 최근 보고서에서 “BB&B 파산은 상업부동산 시장에 충격을 줄 것”이라며 “파산 과정을 통해 늘어난 빈 사무실의 새로운 세입자를 찾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BB&B 매장들 대부분이 입지가 좋은 지역에 있는 데다 최근 상업부동산 신규 건설이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는 만큼 시장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카테고리 킬러상품 분야(카테고리)별로 특화해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대형 소매 유통업체. 사무용품 전문 오피스디포, 가정(주택) 개조 전문 홈디포, 가전제품 전문 베스트바이 등이 대표적이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