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다 위에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서로 엉켜 있다.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얼음 조각 옆에는 난파된 배의 일부가 보인다. 차가운 얼음 바다에 반 이상이 잠겼다. 독일 화가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얼음 바다’(1823∼1824·사진)는 북극 얼음 바다를 묘사하고 있다. 과연 화가는 북극에 가봤던 걸까? 이런 난파 장면을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사실 프리드리히는 북극은커녕 장거리 배 여행도 해본 적이 없었다. 스케치를 위해 산과 들을 다녔을 뿐, 평생 집에서만 은둔했다. 1820년대 초 겨울, 프리드리히는 엘베강에 얼음이 표류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희귀한 자연 경관에 매료된 그는 현장에서 유화로 스케치 석 점을 제작했다. 몇 년 후 그것을 캔버스에 옮겨 그리면서 비율과 구도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북극 얼음 바다라는 주제는 영국 탐험가 윌리엄 패리의 북극 항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패리는 1819년에서 1820년 사이 북서항로의 입구인 패리 해협을 처음 통과했고, 1827년에는 인류 최초로 지구 최북단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해 그 이야기를 책으로도 펴냈다. 그러니까 프리드리히는 실제 자연을 참조하되 상상력을 동원해 이 초현실적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무참히 부서지고 깨지는 얼음과 침몰하는 배를 그렸는데도, 화면은 음소거가 된 듯 고요하다. 바다가 모든 소음마저 삼킨 듯 정적이 흐른다.
이 그림은 처음에 ‘좌절된 희망’이란 제목으로 불렸다. 실제 조난 사고를 당한 ‘희망호’라는 배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렇다고 화가가 좌절을 주제로 그린 것은 아니다. 그림 속 하늘이 점점 맑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햇빛이 비칠 테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