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스테파니 독자 여러분. 동아일보 미래&스타트업팀 데스크를 맡고 있는 김선미 기자입니다. 프랑스 ‘에꼴(École)42’를 들어보셨나요. 교수, 교재, 학비가 없는 파격적인 자기주도형 학습을 내세우며 2013년 파리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교육기관입니다. 그런데 에꼴42의 아시아 최초 캠퍼스가 2020년 1월 서울에 문을 연 것 아세요? ‘42 서울’이랍니다. 기업마다 ‘잘 키운 개발자’ 구하는 게 힘든 요즘, 만 3년이 지나는 동안 42서울은 어떤 성과를 내고 있을지 궁금해 다녀왔습니다.
(스테파니는 ‘스’타트업과 ‘테’크놀로지를 ‘파’헤쳐보‘니’의 준말입니다.)
‘한국판 에꼴42’인 ‘42서울’ 로고. 이노베이션아카데미 제공
●‘42서울’을 운영하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서울 강남구 개포디지털혁신파크에 이노베이션 아카데미가 자리잡고 있는데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의 주된 사업 중 하나가 ‘42서울’입니다.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는 경쟁력 있는 소프트웨어 인재 양성을 위해 정부가 2019년 설립한 혁신교육기관이에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행정과 재정적 지원을 하고 서울시가 공간을 제공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42서울은 국비로 프랑스 에꼴42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그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가져와 적용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구 개포디지털혁신파크 안에 자리잡은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이 곳에서 ‘한국판 에꼴42’인 ‘42서울’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교수, 교재, 학비가 없는 프랑스 ‘에꼴42’
‘42서울’을 얘기하려면 프랑스 ‘에꼴42’부터 설명해야겠네요. 2013년 프랑스 이동통신회사 ‘프리모바일’의 자비에르 니엘 회장이 당시 1억 유로(약 1300억 원)를 출자해 세운 비영리 정보통신(IT) 교육기관입니다. 파리 17구에 자리잡은 건물에서 교육이 이뤄지는데 교수, 교재, 학비가 없는 ‘3無(무)’ 학교에요. 18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합니다. 800대 이상의 애플 맥북에어를 갖추고 있는 프랑스 에꼴42의 컴퓨터실. 에꼴42 제공
에꼴42는 26개국과 제휴를 맺고 47개 캠퍼스에서 같은 내용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1만8000여 명의 학생들이 에꼴42의 소프트웨어 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습을 합니다. 파리 에꼴42는 지원자 중에서 논리력과 기억력을 온라인 테스트해 3000명을 추려낸 뒤, ‘라피신(La piscine)’이라는 이름의 강도 높은 4주 과정 프로젝트와 동료 평가를 거쳐 200명을 최종 선발합니다. 이 학생들을 길게는 5년까지 교육시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길러냅니다.
에꼴42에서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다가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스태프를 찾아가 질문할 수 있다. 에꼴42 제공
‘라피신’은 한국어로 ‘수영장’이란 뜻이에요. 에꼴42를 통해 전 세계에 이 프랑스어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에꼴42는 수영장에 빠뜨려 살아남는 학생을 선발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어요. 코딩을 해 본 적도 없는 문과생 출신이 이 과정에서 숨겨진 적성과 흥미를 느껴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중도 탈락자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42서울도 같은 이름(라피신)으로 학생들을 뽑고 있습니다.
강의와 미팅 등이 이뤄지는 에꼴42의 강당. 에꼴42 제공
처음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교육이 가능하냐”는 주변 시선이 가득했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에꼴42는 이제 선진 교육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글로벌 47개 캠퍼스 중 정부 지원은 한국이 유일합니다. 프랑스는 지방자치단체가 60%, 기업이 40%의 재원을 대고요. 일본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주로 기업가와 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42서울, 구석구석 돌아보다
자, 그럼 42서울을 함께 가보실까요. 우선 42서울에 들어서면 로비층의 오른쪽은 프랑스 에꼴42 강당과 비슷한 디자인의 소파들로 이뤄진 미팅 공간이 있습니다. 왼쪽은 파트너사들의 문구가 벽면을 채우고 있는데요. 라인, 크래프톤, 그렙, 현대오토에버, 고토,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의 로고들이 보입니다. 앞으로 이 벽면이 더욱 쟁쟁한 회사들의 이름들로 빼곡히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42서울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기업 로고가 가득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로비층의 벽면.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42서울의 교육은 2년 과정입니다. C언어 중심의 유닉스 개발 환경에 초점을 둔 기본과정과 자바와 스위프트 등 프로젝트에 적합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학습하는 심화과정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교육 공간은 365일 24시간 개방돼 마음껏 이 곳에서 공부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는 것은 물론 한 명당 월 100여 만원의 교육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습니다. 이 곳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여학생은 “교육 내용도 훌륭하지만 교육지원금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웠다”며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심화과정까지 완주해 원하는 기업의 개발자로 취업하고 싶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 곳에 42랩(Lab)도 새로 마련됐어요. 기초과정을 마친 학습자들이 인공지능(AI)과 로보틱스 등 심화된 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기자재와 컴퓨팅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42서울 1층에 위치한 ‘42랩’ 연구공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42서울은 올해 한 달 과정의 ‘라피신’에 1200명을 받아 연간 400명을 본과정에서 교육시킨다는 계획입니다. 현재 42서울에는 2153명이 본과정 교육생으로 등록돼 있는데요. 입학할 때 평균 연령은 25.7세로 소프트웨어 전공자와 비전공자 비율은 반반쯤 됩니다. 고졸 이상이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입학생 최고령자는 1958년생, 최연소자는 2007년생이었다고 하네요.
프랑스 에꼴42처럼 42서울도 800여 대의 에플 맥북에어를 갖추고 있다. 김선미 기자
42서울 교육 공간의 첫인상은 게임방 같기도 하고 스타트업 사무실 같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차림새와 자세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었는데요. 교수와 교재가 없는 대신 학생들은 단계별 과제를 부여받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동료와의 협업이 중요하더군요. 삼삼오오 모여 칠판에 과제를 쓰고 풀어나가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일부 공간은 세 명 정도가 마주 보는 형태로 책상이 배열돼 있어 자연스럽게 브레인스토밍과 협업을 유도하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입해 있는 42서울의 학생.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우리 42 친밀한 평가42’라는 문구가 붙은 42서울의 내부 공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런데 42서울을 둘러다보니 ‘우리 42(사이) 친밀한 평가 42(사이)’라는 문구가 벽에 걸려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프랑스 에꼴42도 그렇지만 42서울에서도 동료들의 평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교육의 핵심이 자기주도학습과 동료학습이기 때문이죠. 학생들은 한 단계씩 수준이 높아질 때마다 서로 다른 두 명의 동료 학생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평가 포인트 제도가 있어서 평가를 요청할 때마다 1포인트를 소진하고 다른 학생의 평가를 해 줄때마다 1포인트를 벌게 됩니다. 즉 동료 평가를 도와줘야만 포인트를 쌓을 수 있어 ‘상부상조’가 절실합니다.
‘42서울’ 출신들은 어떻게 진로를 찾아갈까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91명 중 65.4%(125명)가 취업 또는 창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종 레벨의 진로는 프리랜서(12.5%), 창업(9%), 군복무(8.2%) 등의 순이었고요. 특히 응답자 10명 중 8명은 “비전공자가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자신감과 실력을 향상하는데 42서울이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일례로 소프트웨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요리를 전공했던 한 여학생(1991년생)은 이 곳에서 2년동안 소프트웨어 개발을 익혀 현대오토에버에 취업했다고 하네요.
42서울 출신들은 LG 유플러스, 삼성전자, 카카오, 네이버, 롯데정보통신, 크래프톤, 요기요 등에 취업했습니다. 42서울 출신들의 초봉은 월 400만 원 이상이 32.6%로 일반 취업자 대비 급여 수준이 높다는 게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측의 설명입니다.
42서울 투어의 마지막 코스를 소개드립니다. 들장미와 금계국이 피어있는 이 곳은 42서울이 위치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건물의 옥상 정원입니다. 뻥 뚫린 하늘을 배경으로 솟은 시그니엘 롯데타워와 타워팰리스를 보면 ‘열공’했던 머리를 식힐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영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으로부터 듣는 ‘42서울’의 미래
42서울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전영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을 만났습니다. 올해 2월 3년 임기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의 2대 학장으로 취임한 전 학장은 KAIST 전산학 박사 출신으로 몇몇 벤처기업들을 공동창업한 뒤 과기정통부 융합소프트웨어 PM으로 활동하다가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ICT 분야 개발자들을 양성해온 이력을 지녔습니다. 올해 2월 취임한 전영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은 “국내 중소 중견기업 CTO(최고기술책임자)들로 멘토단을 구성해 42서울 학생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전 학장은 “에콜42는 본래 학위가 없는 비학위 교육기관이지만, 올해부터 42서울은 심화과정까지 마친 학생들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줄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와 한국의 실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학생들이 교육을 마치고 나면 기업들에서 ‘인턴’을 하다가 취업으로 이어지는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서의 취업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42서울은 설립 3년이 지나면서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업계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났지만 한 두 달 다니고 관둔 학생들조차 “42서울 출신”이라고 말하면서 어느 정도의 ‘수준 증빙’과 ‘검증’이 필요해진 시점이 됐다네요. 앞으로 관련 업계에서 ‘42서울 졸업 증명서’가 어느 정도의 파워를 가지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프랑스 에꼴42를 도입했던 42서울. 정부 예산으로 에꼴42에 로열티를 계속 지급하고 있는 만큼 이 교육의 성과와 효율에 대한 보다 정밀한 진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전 세계적으로 개발자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지금, 42서울이 국내 산업계의 인력 수급에 단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내 실정에 맞는 민관 협력이 절실합니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처럼 기업에서의 인턴십과 기술 트렌드 제공 기회를 늘리고, 산업계와 실질적 교류 기회를 늘려야겠습니다. 만 세 살이 된 42서울이 국내 디지털 생태계의 구심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