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징용 문제에 대해 한국이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이제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한국의 여론상 그것은 일본의 ‘또 한 번’의 사과를 의미하는 것 같다. ‘또 한 번’이라고 한 것은 우리 머릿속에는 잘 안 떠오르는 일이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일본은 여러 차례 사과해왔기 때문이다. 사과를 주저하는 일본의 여론에는 ‘이번에 사과하면 정말 마지막일까?’라는 마음도 숨겨져 있는 듯하다.》
日 수십 차례 과거사 사과
1998년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도쿄 영빈관에서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공동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식민통치관 있는 보수들의 망언도
저런 발언들이 튀어나온 배경에는 일본 보수우익에 잠재돼 있는 식민통치관이 있다. 그것은 첫째, 일제의 동화정책은 조선을 식민지가 아니라 같은 일본으로 만들려고 한 선의에서 비롯됐던 것이고, 이 점에서 서구 제국주의와는 다르다는 점, 둘째, 식민통치는 경제, 의료, 교육, 인구 증가 면에서 발전을 이뤄 조선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셋째, 당시는 제국주의가 세계적 대세였는데 일본만 비난받는 건 억울하다는 점, 넷째, 일본이 식민지로 삼지 않았으면 러시아나 청나라가 침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표면적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아직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1990년 5월 왕궁 만찬석상에서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귀국의 국민이 맛본 고통을 생각하니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며 한일 과거사에 대해 유감을 표한 뒤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1990년대는 그야말로 ‘사과 릴레이’가 이어졌는데, 그 표현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준 것을 깊이 반성하고 사과한다”며 ‘침략’ ‘식민지’란 말을 구체적으로 들어 사과했다. 같은 해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군의 간여와 강제성을 인정하며 “종군위안부로서…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는 유명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8월 전후 70년 담화에서 “일본은 지난 세계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동아일보DB
韓日, 역사에 성숙한 자세 보여야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계속 사과를 요구하는 걸까. 우선은 위에 소개한 일본의 사과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한국 시민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인들의 ‘망언’이다. ‘창씨 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 ‘전쟁터의 위안부는 필요한 제도였다’ 등 수시로 터져 나오는 ‘망언’들은 위의 ‘사과 릴레이’를 순식간에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게다가 ‘망언’을 한 사람들이 민간인들이 아니라 현직 장관, 유력 정치인들이니 더욱 심각하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사과를 ‘진정성이 없다’며 의심하는 것은 대부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를 리드해야 할 국가들이다. 우리는 일본이 ‘뭘 화해하자는 말이냐’에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까지 역사 인식을 진전시켜 오며 수십 차례 사과한 것을 인정하고 평가하자. 다만 그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책임 있는 당국자의 ‘망언’은 용서할 수 없다고 단단히 못을 치자. 그게 ‘또 한 번’의 사과 요구보다 더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