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유튜버
어떤 나라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나에게는 그 나라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행사나 기념일, 축제를 살펴보는 것이 왕도인 것 같다. 한국하면 K팝, K드라마를 자동으로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면의 한국을 이해하고 싶다면 연중으로 끊이지 않는 다양한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권한다. 부산영화제, 보령머드축제,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얼음나라화천산천어축제 등이 익히 알려진 행사들이라면 좀 더 특이한 행사들, 예를 들어 하모니카페스티벌, 한우축제, 인삼축제, 쌀축제, 장축체(된장·고추장) 등은 지역성이 강해서 다소 덜 알려진 축제들이다. 그래도 이런 축제들을 한 번씩 참가해 보면 왠지 ‘인싸’가 되는 느낌이 한층 강해질 듯하다.
여기 또 하나의 특별한 축제를 소개할까 하는데 이름하여 멍때리기 대회다. 인생에서 멍때리고 있다가 놓치는 것들도 많이 있어서 나 같은 경우는 서울자전거대행진 참여기간을 놓치고 말았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인지라, 대신 이번에 멍때리기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멍때리기로 말할 것 같으면 난 초등학교 때부터 유명했다. 생각이 좀 많은 탓에 신기한 사실을 발견하면 자유연상법을 유감없이 발휘해 딴 세상에 있는 얼굴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기 일쑤였다. 지금도 가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거나 하면 이유 없이 멍해질 때가 있는데 초점이 흐려지고 4차원 세계를 응시하는 듯한 얼굴 표정으로 전환이 쉽게 이루어져서 이번 멍때리기 대회의 우승도 도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니, 내일모레면 바뀔 내 나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등판 번호로 50번을 부여받았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곱씹으면서 조용히 생각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고 내가 앉을 자리로 향했다. 땅바닥에 70개의 요가 매트가 준비돼 있었는데 난 양반은 절대 아니어서 앉아서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리 근육이 요동쳤다. 이래저래 다리를 틀어 겨우 진정시키고 내 주변의 경쟁상대들을 관찰했는데, 내 옆자리엔 부녀로 보이는 팀이 앉아 있었다. 십대로 보이는 딸이 조용히 앉아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고 파랗게 부는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는 한강을 쳐다보며 명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개가 점점 숙여지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 요가 매트 위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수많은 점들을 하나씩 세고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점점 졸리는 기운이 느껴지던 찰나에 누군가 내 심장 모니터에 가까이 다가왔는데 나는 그때 화들짝 놀라 잠들어 있던 심장박동을 정상으로 깨울 수 있었다. 전화도 시계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내 다리와 허리가 그래도 참을 만한 것을 보니 시간이 그다지 많이 지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그때 45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아니나 다를까 다리와 허리에서 심각한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잊어보고자 요가 매트 표면을 더욱 열심히 째려보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요가매트 위의 파란 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어렸을 때 자주 보던 매직아이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집중했던 탓이었는지 갑자기 근위병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나를 흔들면서 갑자기 일어서라고 명령을 내렸다. ‘탈락입니다’라는 선고와 함께 말이다. 일어서라는 지시를 몇 분 전에 내렸는데도 내가 일어나지 않아서 관군들이 내가 저항하는 줄 알았을 것 같은데 사실은 다리에 쥐가 나서 냉큼 일어서는 게 불가능했다. 어쨌든 누가 우승을 하는지 궁금해서 대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내가 과소평가했던 옆자리의 소녀가 2∼3위를 차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행사는 다수의 참가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불안함을 다 함께 이겨보고자 하는 일종의 행위예술 차원에서 조직됐다고 했다. 이 대회의 개최 목적을 알고 나니 미국의 사진작가인 스펜서 튜닉의 대규모 누드 설치 예술을 떠올리게 됐다. 예술을 통해 불가능한 것들을 실현하며 일상적 통념에 도전한다는 면이 일맥상통해 보였다. 이번 멍때리기 대회에서 나는 중간에 탈락하는 불명예를 얻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여운이 남는 경험을 얻은 듯하다. 공백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채우는 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여러분도 때때로 서울에 대한 유혹적인 시선은 잠시 거두고 허공이 주는 충만함으로 기운을 정화하시기를 권해 드린다.
폴 카버 영국 출신·유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