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무능한 지도자로 불렸습니다. 2차 오일쇼크에 따른 고물가와 저성장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란 혁명 세력이 테헤란 미 대사관에 미국인 52명을 444일간 억류할 당시 구출 작전에 실패하면서 최강대국의 자존심이 무너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도덕, 인권을 중시하며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빌미를 줬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결국 카터는 ‘강한 미국’을 내세운 영화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에게 밀려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66%에서 시작했던 그의 지지율은 퇴임 당시 34%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하지만 자연인으로 돌아간 카터는 기존의 전직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계를 돌며 민주주의, 인권, 기아 퇴치를 외쳤습니다. 자신의 목공 기술을 활용해 세계 빈민촌에서 집짓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2018년 8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그의 부인 로절린 여사가 푸른 헬멧을 쓰고 집짓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봉사단체 해비타트를 후원하며 14개국에 4300여 채의 집을 짓는 것을 도왔다. AP 뉴시스
무능한 대통령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로 거듭난 그는 죽음마저 남다르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 암 투병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카터에게 재직 당시 무능은 이제 큰 논란거리가 아닙니다. 전직 대통령도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는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에 남긴 공로가 커 보입니다.
● 文·MB 총선 앞두고 정치 행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달 자신의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에 ‘평산책방’을 열었습니다. 마을 주민을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선한 취지를 앞세웠습니다. 하지만 무급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가 ‘열정페이’ 논란으로 철회했고, 공익사업이라면서 사업자 명의를 재단이 아닌 문 전 대통령 개인으로 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책방도 실상은 주민들이 아닌 친문 세력의 아지트로 쓰이는 모습입니다. 책방은 사실상 문 전 대통령의 팬 미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내년 총선 출마를 앞둔 친문 의원이나 문재인 정부 출신 인사들이 그와 사진을 찍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오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의 ‘평산책방’에서 마을 주민들과 현판식을 하고 있다. 애초 마을 주민 휴식 공간을 자처했던 책방은 최근 친문 세력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다. 뉴시스
퇴임 후 “잊힌 삶을 살고 싶다”고 했던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내놨습니다. 최근엔 다큐멘터리 영화 ‘문재인입니다’를 통해 “5년간 이룬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허망한 생각이 든다”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 중에 내년 총선을 준비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며 “이들 입장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구심점이 돼야 한다. 문 전 대통령이 자꾸 뉴스의 중심에 서는 게 본인의 뜻에 의한 것인지, 친문 세력의 정치적 요구에 의한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얼마 전 서울시장 재임 당시 청계천 복원사업을 함께했던 서울시 공무원 모임인 ‘청계천을 사랑하는 모임’(청사모) 구성원과 청계천을 찾았습니다. 이날 MB정부 출신의 이재오 전 특임장관, 정운천 의원, 2007년 대선 당시 외곽조직인 선진국민연대 관계자 등 약 100여명이 동행하면서 세 과시에 나섰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를 평가해 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잘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 그런 평가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정국에 대해 “어려울 때니까 힘을 좀 모아줘야 한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5일 MB 정부 인사, 서울시장 재임 당시 청계천 복원 사업에 함께 했던 청사모 회원들과 서울 청계천 돌다리를 건너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사면받은 후 보수층 결집을 위한 행보에 나서고 있다. 동아일보 DB
윤석열 정부는 MB정부 출신 인사를 대거 중용하면서 ‘MB정부 시즌2’로 불릴 정도로 인적 네트워크가 겹칩니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이관섭 국정기획수석, 김은혜 홍보수석, 강승규 시민사회수석 등이 모두 MB정부 출신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현 정부에서 사면 조치를 받은 뒤 보수층을 겨냥한 정치적 보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 퇴임 후 반성문 썼던 노무현 전 대통령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8년 7월 한국의 전직 대통령을 분석한 기사에서 “7명의 국가 원수들은 모두 부패 추문에 휘말렸다”면서 “부정부패는 한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버릇이 아니라 특징이 돼왔다”고 꼬집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부패 수사는 어떤 면에서는 정권교체에 따른 정치보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패 추문에 휩싸인 퇴임 대통령들은 대체로 침묵하거나 자신의 재임 시절을 미화하면서 정치 투쟁을 벌였습니다. 유일하게 재임 시절에 대한 반성문을 남긴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자기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친환경 쌀, 숲 가꾸기, 생태하천 복원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퇴임 후 자전거를 타고 동네 주민들과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모습에서 신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회고록 성격의 공개 반성문을 썼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집필한 책, 육성기록을 통해 참여정부의 실책을 짚었습니다. 거시경제 지표는 좋아졌지만 양극화 심화로 서민들의 삶은 나빠졌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부동산 문제의 정책적 오류에 대해서도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당정분리, 독선과 아집, 무리한 의제, 언론의 흔들기와 관료의 무력화, 말씨와 품위 등을 ‘노무현의 오류’로 기록했습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변 세력은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두고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남긴 통합과 반성의 유산은 사라지고 극한의 대결 풍토만이 남았습니다.
● 트럼프·보우소나루…민주주의를 망친 전직들
퇴임한 대통령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참고할 연구 자료도, 지침도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은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갈 권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카터와 같은 봉사의 삶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 화가로 변신해 대통령 때보다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해외에서는 K정치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논란을 빚는 대통령도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패하자 부정 선거를 주장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2021년 1월 의회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최근 ‘성추문 입막음’ 혐의로 기소된 그는 법정 출석 대신 정치 투쟁에 몰두하면서 재선을 준비 중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4일(현지 시간)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열린 기소 인부 절차를 마친 뒤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자택으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린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발언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부정선거 주장, 성추문 입막음 등 각종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AP 뉴시스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는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은 대선 기간 내내 자신의 패배가 예상되자 투표 시스템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리면서 민주주의 신뢰도를 떨어뜨렸습니다. 전임자가 후임자 취임식에 참여하는 관례를 깨고 후임 룰라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뿌린 부정선거 음모론의 영향으로 올해 1월 브라질에서는 보우소나루 극렬 지지자 수백 명이 대선 결과에 불복하며 대통령궁과 의회, 대법원에 침입해 기물을 파손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자신의 재선을 위해 음모론을 끌어들여 지지층을 선동하는 일부 해외 전직 대통령을 보면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은 양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들의 행보에서 아쉬움이 남는 건 그들의 언행에서 지지층 결집 이상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임 시절에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지지층과 반대파를 갈라쳤더라도 퇴임 이후에는 정치 현실을 성찰하고 국론 통합에 나서는 게 국가의 예우를 받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격이라고 생각합니다.
● 후임자 성공을 위해 경험을 전수한다면…
1989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을 남겼습니다. 수신인은 다음 날 취임하는 조지 H.W 부시였습니다. 레이건은 편지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보람도 느낄 수 있다”면서 “바보들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조언을 남겼습니다.레이건이 만든 ‘조언 편지’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도 자신의 후임인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도울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라고 적었습니다. 싸움닭 트럼프도 이때만큼은 “오바마 대통령이 남긴 아름다운 편지를 발견했다. 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했죠. 여러 정치 관례를 깬 트럼프지만 그도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손편지를 남기는 전통만큼은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후임자의 성공에 힘을 보태는 것도 전직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역할입니다. 한국은 필리핀, 멕시코, 콜롬비아, 온두라스, 과테말라, 파라과이 등과 함께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당연히 아무리 좋은 인물을 뽑아도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K정치 현실에서 판타지 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당적과 관계없이 전·현직 대통령이 마주 앉아 국정을 논의하고 경험을 전수하는 모습을 보면 좋겠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대방을 때리는데 골몰하는 대신 대통령만이 가진 경험을 나눈다면, 극한 정치에 지친 많은 국민이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