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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예술도 좋지만, 읽고픈 작품도 있어야[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입력 | 2023-05-27 03:00:00

흥행성-작품성 갖춘 작가 발굴해
출판계 부흥 일으키자는 부커상
우리 문단에도 이런 흐름 생기길
◇악스트 창간호/악스트 편집부 엮음/256쪽·2900원·은행나무



이호재 기자


“먹고살기 힘들어 문학판을 떠나려고 했어요.”

천명관 작가(59)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장편소설 ‘고래’(2004년)로 올해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 전까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가 2016년 장편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 이후 책을 펴내지 않다가 지난해 3월 영화 ‘뜨거운 피’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왜 그는 먹고살기 힘들었을까.

2015년 출범한 문학잡지 ‘악스트’의 창간호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천 작가는 악스트에 “글을 써서 자기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어야 한다”며 “문학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밥벌이가 돼야 한다”고 토로했다. 또 천 작가는 “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며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분위기가 문제”라고 했다.

천 작가는 대학 국문학과 교수 등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이른바 ‘선생님’들을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천 작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왜 선생님들의 지도편달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며 “대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도 했다.

사실 천 작가는 ‘선생님’들이 외면한 작가가 아니다. 천 작가는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2004년 문학동네 소설상, 2014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고래’가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걸 보면 사실 ‘선생님’들의 판단이 시장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보긴 힘들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을 오롯이 ‘선생님’들 탓으로 몰 수도 없다.

다만 요즘 영국 ‘선생님’들은 변화하는 독서 시장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부커상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에 번역된 소설을 구매한 독자 중 35세 이하가 절반(48.2%)에 달한다. 반면 60세 이상 독자는 13.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젊은 독자가 좋아할 만한 신선한 작품을 소개해 출판계를 부흥시키자는 게 영국 ‘선생님’들의 전략이다. 부커상은 이 전략을 홈페이지에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출판계가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한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지목된 후 ‘고래’는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에서 ‘신작 코미디 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국내 서점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다. ‘고래’가 비록 최종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영국 ‘선생님’들 덕에 천 작가는 일단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문학의 모든 걸 시장에 맡길 순 없다. 다만 한국 ‘선생님’들도 영국 ‘선생님’들처럼 변화하는 독서 시장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 젊은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신선한 작품을 ‘선생님’들이 발굴한다면 독자가 유튜브가 아닌 책과 가까워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이 팔리면 작가의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다. 그래야 능력 있는 작가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문학판을 떠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