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생의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3월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의 한 기업 사무실 모습. 직원 다수가 재택근무를 하거나 시차출근제로 출근하면서 자리 곳곳이 비어 있는 모습이다. 프랑크푸르트=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지난 3월 독일 헤센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한 한국인 회사원이 말했다. 그는 한국 회사 직원으로 독일법인에 파견돼 몇 년째 근무 중이었다. ‘독일에서 일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을 묻자 그는 “차나 집을 손수 고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신기했다”고 했다. “그것 역시 일찍 퇴근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다 보니 그런 것 같다”며 “그래서 이 나라에 공구가 그렇게 발달했나 보다”고 웃었다.
또 다른 회사에서 만난 독일인 직원은 “평상시 오후 5, 6시면 퇴근해 집에 간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주로 오후 7시 넘어서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기자가 이야기하자 그는 “오후 7시? 그때면 일이 남은 관리자급 외에 일반 직원들은 회사에 남아있지 않을 시간”이라며 “대부분 그 전에 그날 일을 다 끝내고 퇴근한다”고 덧붙였다.
● 독일 근로시간 상한, 한국보다 긴데…
3월 말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독일 등 유럽 근로시간 제도와 문화에 대해 취재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독일의 근로시간이 한국보다 짧고 유연하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어왔지만, 막상 가서 본 독일 직장인들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재택근로가 활성화돼있었고, 시차출퇴근제(정해진 근로시간만 채운다면 서로 다른 시각 출퇴근할 수 있도록 한 제도) 같은 유연근로가 일반적이었다. 독일인 직원의 말처럼 오후 5, 6시면 극히 일부 관리자급 직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퇴근했다. 이른 저녁에도 사무실이 휑뎅그렁했다.
독일 근로시간 제도 책자. 독일 노동사회부 제공.
독일의 경우 법정근로시간이 하루 8시간, 연장근로시간은 최대 2시간이다. 이를 일주일로 환산하면 주 5일 기준 50시간, 주 6일 기준 60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게 된다. 물론 6개월간 주 평균 근로시간을 48시간 이내로 맞춰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대부분 주 48시간 이내로 일하지만, 어쨌든 한 주에 한해서는 최대 60시간까지 일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독일과 우리의 근로시간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독일이 더 길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상적으로 보면 다르다.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근로시간 자료에 따르면 독일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349시간으로 조사국 가운데 가장 짧았다. 반면 한국은 1910시간이었다. 한국인들이 독일인들보다 무려 561시간 더 길게 일했다.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공개한 회원국 1인당 연평균 근로시간. OECD 제공.
● 선진적 근로시간, 비법은 정확한 기록
무엇이 문제일까. 기자가 본 두 나라 간 차이의 이유는 근로시간을 정확히 기록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다. 독일의 기업들은 근로자들의 실근로시간을 정확히 기록했다. 방식은 다양하다. 기계를 이용해 기록하기도 하고, 수기로 각자가 출퇴근한 시각을 관리자에게 제출하는 곳도 있었다. 재택근로자들도 각 회사가 정한 출퇴근 정의에 맞게 근로시간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한 회사는 직원들이 회사 메신저에 접속하는 시간을 출근시각으로 정해 그때부터 메신저 로그아웃 시간까지를 근로시간으로 책정한다고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회사를 나설 때도 해당 시간을 기록했다. 한 독일 회사 인사팀 직원은 “식사 시간이 1시간이면 1시간, 30분이면 30분을 실근로시간에서 빼서 기록한다”고 설명했다.
생산직 근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자가 방문한 고무 재생공장은 직원이 80명 남짓한 소규모 기업이었는데 이곳 근로자들도 모두 근태기록기기에 출입증을 찍는 방식으로 출퇴근 시각을 기록·관리하고 있었다.
독일 바이에른주 하멜부르크에 있는 고무 재생공장 내 근태기록기기. 공장 직원들은 출입증을 저 기계에 찍어 각자의 근로시간을 기록한다. 하멜부르크=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이렇게 정확히 기록하면 뭐가 달라질까? 초과근로가 줄어든다. 그리고 근로자가 원하는 시각에 일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근로시간이 정확히 확인되기 때문에 굳이 직원들을 같은 시각에 출퇴근시킬 필요가 없다. 법정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만 근로한다면 누군가는 오전 7시, 누군가는 오전 9시에 출근해도 된다는 뜻이다. 오전 7시에 출근한 직원은 법정근로시간 8시간에 점심시간으로 빠지는 시간 1시간을 더해 오후 4시에, 오전 9시에 출근한 직원은 오후 6시에 퇴근하면 될 것이다. 만약 어느 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느라 오전 10시에 출근했다면? 8시간 일하고 점심시간은 30분으로 줄여 오후 6시 반에 퇴근할 수 있다.
기자가 방문한 회사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이 회사 역시 시차출근제와 재택근무 활성화로 책상 곳곳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언제, 어디로 출근하든 직원들은 각자의 근로시간을 제출하거나 기록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정확히 기록된 근로시간, 저축했다 휴가로 보상
유럽의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라는 것도 사실 이런 시간 관리를 바탕으로 탄생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는 법정근로시간 이상 일한 시간을 모아서 ‘저축’했다가 나중에 돈이나 휴일로 보상받을 수 있게 한 제도다. 기자가 방문한 독일의 한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하루 8시간이 법정근로시간인데 근로자가 8시간 55분 일했다고 하면 정확히 55분이 (근로시간 저축계좌에) 적립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기업들도 근로시간을 기록하긴 한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명세서(임금대장)에 근로시간을 적도록 돼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급여를 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 기업이 대략 산정해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근로자들의 실근로시간을 정확히 기록하고 이를 2년 이상 보관하는 게 법적 의무다. 이런 제도를 토대로 각자 주어진 시간 안에서 출퇴근시간을 정하고 초과근로한 시간은 정확히 보상받다 보니 독일에선 한국에서처럼 괜히 늘어지게 일할 필요도, 서로의 눈치를 보며 퇴근을 미룰 필요도 없었다. 사무실이든, 외부에서든 주어진 일을 정해진 시간 안에만 하면 됐다. 상대적으로 근로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실 기업 입장에서도 근로시간이 늘어져서 좋을 건 없다. 그만큼 근로자에게 초과근로수당을 주고 사무실 가동시간을 늘리는 등 부대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보다 짧은 시간 내 마치고 일찍 사무실 문을 닫을 수 있다면, 즉 근로자들이 효율적, 압축적으로 일한다면 그건 기업 입장에서도 이득일 것이다. 실제 국민 1인의 시간당 생산성은 독일이 1.6배 이상 높다.
어린이집 연장반에서 아이들이 부모를 기다리며 선생님과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 동아일보DB
● 제도가 문화를 바꾼다
한 대선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외친 지 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의 다수 직장인들은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오후 8, 9시 퇴근하고 나면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기에도 빠듯하다. 차나 집을 고치는 취미활동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번에 독일을 가보고 느낀 것은 독일의 ‘저녁이 있는 삶’이 거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과 제도라는 기틀이 먼저 선 뒤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스템과 문화가 도입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이미 19세기 말부터 근로시간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20세기 초 관련 제도들이 도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축계좌제, 근로시간 기록 의무도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도입, 정착한 것이었다. 짧은 근로시간과 유연한 근로 문화는 그 산물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변화는 거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부가 수정 보완해 발표할 근로시간 개편안이 그런 변화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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