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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오스만 국뽕’ 앞세워 대선 승리하나[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입력 | 2023-05-28 09:00:00

에르도안, 28일 치러지는 튀르키예 대선 결선 투표에서 승리 가능성 높아
‘강한 튀르키예’ 강조하는 민족주의와 지역 패권 정책으로 경제 위기 덮어
시리아, 리비아, 아제르바이잔 전쟁 개입하며 지역 영향력 키워
재집권하면 동유럽‧중앙아시아로도 적극적인 영향력 행사 나설 듯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의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튀르키예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가 28일(현지 시간) 치러진다.

경제만 놓고 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14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이미 패배했어야 한다. 살인적인 물가 폭등, 국민소득 추락, 대지진 뒤 더딘 복구 작업, 인플레이션 속에서도 금리를 낮추는 이상한 통화정책 등 에르도안 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낙제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튀르키예 이스탄불 시내에 걸려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선거 광고판. 에르도안 대통령은 14일 진행된 1차 대선 투표에서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지만, 28일 치러지는 결선 투표에서는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동아일보 DB


올해 2월 튀르키예 남부 시리아와의 접경 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으로 5만 명 이상이 사망했을 때는 상당수 사람들이 ‘에르도안 정권은 끝났다’고 예상했다.

“이렇게 큰 재난에는 준비가 돼 있기 불가능하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발언과 1999년 서부 해안 도시 이즈미르에서의 대지진 발생한 뒤 지진 대비 목적으로 걷기 시작한 ‘지진세’가 어떻게 사용됐는지 제대로 설명 못하는 정부의 모습에 튀르키예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달랐다.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진 못했다. 그럼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49.52%의 득표율을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는 44.88%의 득표율에 그쳤다. 그리고 1차 투표에서 5.17%의 득표율로 3위에 오른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는 ‘에르도안 지지’를 선언했다. 이변이 없으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결선 투표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AP 뉴시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 AP 뉴시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내각책임제 시절 총리에 오르면서 튀르키예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2014년 총리 퇴임 직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2017년에는 대통령제 도입을 담은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번 결선 투표에서도 승리하면 2033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진다. 30년간 최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기 튀르키예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는 주변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영향력 행사가 꼽힌다. 다양한 이유, 특히 국익을 내세웠다. 그리고 지향점과 메시지는 분명했다. 바로 ‘강한 튀르키예’, 좀더 노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재건’이었다. 말 그대로 화려한 과거를 상기시키며 ‘국뽕’을 자극한 것이다. 이전의 세속주의와 친서구 성향 튀르키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경제난이 심각하지만 튀르키예 사회 전반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 10년 간 내세워 온 민족주의, 지역 패권 정책, 이슬람주의가 잘 먹히고 있다는 뜻”이라며 “특히 지역 패권 정책은 민족주의, 오스만 제국 시절 영광의 회복, 이슬람주의 등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전략이라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선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 더욱 힘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쿠르드족 독립 막는다며 시리아 북부 사실상 점령
시리아는 튀르키예의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 움직임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튀르키예 남부와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는 ‘아랍의 봄(아랍권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2011년 내전에 휩싸였다. 10년 간의 전쟁 끝에 세습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반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때 튀르키예는 반군 편에서 시리아 내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2019년 10월 미군이 시리아 철수를 발표하자 곧바로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집단 거주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튀르키예는 자국민의(약 8500만 명) 20% 정도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이 시리아, 이라크 등 주변국 거주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것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긴다. 이번 대선에서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 견제를 강조했다.

2019년 10월 튀르키예의 시리아 북부 침공 상황.  동아일보DB



당시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에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했고 민간인 거주 지역에도 공격을 자행했다. 또 시리아 북부(튀르키예 기준으로는 남부)에 길이 444km, 폭 30km 지역을 ‘안전지대(완충지대)’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군대도 주둔시켰다. 사실상의 영토 확장 조치였다.


올해 2월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파괴된 마을에서 주민들이 구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이 마을에서는 튀르키예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쿠르드족을 차별한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의 독립 움직임을 가장 큰 안보 위협으로 여겨왔고 선거 운동 중에도 ‘쿠르드족 견제’를 강조했다. 동아일보 DB



중동 외교가 관계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중동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며 “미국과 유럽의 강도 높은 비난에도 튀르키예가 노골적으로 쿠르드족 공격, 나아가 시리아내 군사를 주둔시키는 모습에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는 이전의 튀르키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 북아프리카 자원부국 리비아에선 ‘아랍 맹주’ 사우디와 대리전 중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많은 리비아에서도 튀르키예의 존재감은 크다.

리비아 역시 아랍의 봄의 여파로 2011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좌에서 쫓겨났고 내전에 휩싸였다. 현재 리비아에선 수도 트리폴리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통합정부(GNA)와 동부 유전지대를 장악한 세속주의 군벌 리비아국민군(LNA)가 충돌 중이다. 튀르키예는 GNA, 사우디는 LNA의 핵심 지원국이다. ‘아랍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 사실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리비아 내전에서 튀르키예와 사우디는 각각 다른 진영을 지원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17년 6월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집트가 카타르의 친이란 외교 등을 문제 삼으며 터진 ‘카타르 단교 사태(외교 관계를 비롯해 무역, 교통, 관광 등 모든 교류를 일시에 중단)’ 때도 튀르키예는 사우디에 맞서 카타르 편에 섰다.

당시 튀르키예는 카타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카타르에 파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아라비아반도에서 철수했던 튀르키예 군대의 공식적인 첫 귀환이었다. 또 주요 식량의 80% 정도를 사우디로부터 수입해 오던 카타르가 일시적인 식량 부족 사태를 겪을 때는 이를 적극 지원했다. 장 센터장은 “사우디로서는 이미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적극적이었던 이란에 이어 튀르키예까지 자국 바로 앞에서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사우디의 튀르키예에 대한 감정은 나쁘다. 중동 전문매체인 미들이스트모니터에 따르면 사우디에서는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오스만 제국 시절 점령군이 저질렀던 범죄 등 튀르키예 관련 부정적인 내용을 대거 늘리고 있다. 사우디에 주재했던 교민에 따르면 현지 매체에서 “튀르키예에 가급적 여행을 가지 말라”는 기사도 자주 게재됐다.

2020년 9~10월 튀르키예와 민족, 종교,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인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중동과 동유럽에선 ‘튀르키예의 동생 국가’로 불릴 정도로 튀르키예와 가깝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스만 제국의 대학살로 인한 피해를 강조해왔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 지역. 동아일보 DB



전쟁에서 단기간에 아제르바이잔이 승리하는 데 튀르키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성능이 우수한 튀르키예산 무인기(드론)를 앞세워 아르메니아의 지상군 전력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영토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에 넘겨줘야 했다.






● 재집권하면 지역 패권 전략을 ‘성공 키워드’로 인식해 더 집중할 수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선 결선 투표에서 최종 승리하게 된다면 더욱 강도 높은 지역 패권 전략을 수립할 가능성이 높다. 최장 2033년까지 집권 가능하게 됐고, 국내 경제가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확실히 표를 주는 이른바 ‘튀르키예 보수층의 결집’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에르도안 대통령에겐 지역 패권 전략이 성공 키워드인 셈이다.

향후 튀르키예는 중동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도 영향력 확장에 나설 수 있다. 그 대상으로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가 꼽힌다. 과거 오스만 제국이 직‧간접적으로 지배했고,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튀르키예는 2021년 11월 튀르크어 계열 언어를 쓰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도 결성했다. 정식 회원국은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헝가리는 참관국이다.


지난해 11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TS)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 OTS 홈페이지 캡처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OTS 결성은 에르도안 정부가 전방위적 지역 영향력 확장에 나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며 “다만 튀르키예와 우호 관계인 러시아와 중국이 중·장기적으로는 튀르키예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움직임에 민감하게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내 분열과 반미 전선 확대 차원에서 튀르키예에 우호적인 스탠스를 보여 왔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 모두 ‘제국의 경험’을 지닌 튀르키예가 자신들의 앞마당 격인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특히 이 지역 무슬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튀르키예와 현재까지는 큰 갈등이 없지만 이란에도 아제르바이잔계 인구가 적지 않다. 이로 인해 튀르키예의 지역 영향력 행사 전략이 계속되면 중동의 또다른 맹주인 이란과도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다.






● 경제는 어디에?
경제난 속에서도 경제 어젠다가 딱히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튀르키예 대선.


지난해 6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는 시민. 튀르키예는 살인적인 물가 폭등으로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동아일보 DB


에르도안 대통령도 선거 기간 중 내세운 경제 정책이 있다. 하지만 가정용 가스 무상 공급 확대, 최저 임금 인상, 학생들에 대한 무료 인터넷 데이터 제공, 연금 수급 개시 연령 폐지 등 다분히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정책들이다.

당연히 튀르키예 안팎에서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우려도 크다.

튀르키예에서 귀화한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 씨는 “에르도안 정부의 경제 정책은 매우 포퓰리즘적이고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해도 경제 위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