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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칼럼]권력의 곁불 쬐다 스스로 불타버린 어느 헌법기관

입력 | 2023-05-29 03:00:00

투톱 사퇴… 60년 역사에서 최악 위기 처한 선관위
‘채용 일탈’보다 더 큰 문제는 ‘公正 신뢰’ 망가진 것
권력에 영합하고 갈대처럼 휘둘리다 제 무덤만 판 꼴
헌법적 권위 못 세우면 선거 근간 흔드는 대혼란 온다



정용관 논설실장


“선거와 국민투표의 관리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정당에 관한 사무가 불공정하게 처리되는 경우에는 선거와 국민투표는 그 본래의 민주 정치적 기능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의 장식적 기능밖에 못 하게 된다.” 헌법학계 원로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가 1995년 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위와 권한’에 나오는 대목이다.

최근 ‘아빠 찬스’ 의혹 등으로 사무총장과 차장 등 투톱이 동시에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선관위. 한때 국민이 신뢰하는 국가기관 1위 평가를 받기도 했던 선관위가 어쩌다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이처럼 추락하게 됐을까. 단지 폐쇄된 조직 문화, 외부 감시 체계 미흡 등의 문제로만 보기엔 허망하다. 선관위는 민주적 정당성과 관련된 필수적 헌법기관으로 권력의 하수인이 돼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던 허 교수의 28년 전 논문을 모두에 길게 인용한 이유다.

올해 60돌을 맞은 선관위는 살아 있는 권력과 갖은 곡절을 겪으며 한때 해외에서도 부러워하는 위상을 확보해 왔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선관위 방문을 거절했다는 일화, 민정당 총재를 겸하던 현직 대통령에게 경고 서한을 보낸 일화 등이 지금도 회자된다. 1992년 대선을 관리했던 윤관 위원장은 정치인과 일체의 접촉을 삼가며 선관위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선거에 영향을 주는 듯한 발언을 수시로 내놨던 노무현 대통령과도 재임 기간 내내 긴장 관계의 연속이었다. 정권마다 청와대 검찰 경찰 감사원 등 권력기관이 선관위에 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선관위는 국민 여론을 든든한 방패막이로 삼고 난관을 뚫어 갔다. 적어도 여야 모두에 어느 한쪽으로 확 치우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진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관위의 정치적 오염, 도덕적 오염은 문재인 정권 들어 본격화했다고 본다. 그 중요한 계기가 된 게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사건이었다. 김 원장의 정치 후원금 셀프 기부 의혹이 제기되자 당시 실세인 임종석 비서실장은 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다. 그때 ‘위법’ 해석을 단호히 관철시킨 이가 고졸 출신으로 선관위에서 잔뼈가 굵은 김대년 사무총장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역설적으로 선관위가 권력에 예속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이다. 정권은 그의 선관위원 임용을 반대하는 등 뒤끝을 보였다. 이후 상황은 길게 쓰지 않겠다. 문재인 캠프에서 특보로 활동한 인물이 상임위원으로 임명되고, 대법관 서열 10위이고 시도 선관위원장 경험도 전무하지만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김명수 대법원장과 코드가 맞았던 인사가 선관위원으로 지명돼 5부 요인 자리에 앉기도 했다.

공교롭게 선관위 고위직들의 일탈도 그 무렵이다. 정치 권력엔 대등하게 맞서며 민주주의의 꽃을 책임지고 관리한다는 사명감과 자존감은 온데간데없고, 고작 자식 채용 등에만 눈독을 들인 것이다. 참담한 상황이다. 지금 선관위는 비대위라도 구성해야 할 판이다. 투톱 사퇴는 이제 선관위 개혁 논의로 불붙을 것이다. 그 전제는 선관위 위상부터 다시 정립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야 모두에 불편하고 골치 아프고 못마땅한 존재가 바로 선관위의 정치적 포지션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제도적 보완책에 대한 공론화도 필요하다. 선관위원장은 대법관이 맡는 게 관례로 돼 있지만 독립된 헌법기관의 장을 다른 헌법기관의 구성원이 겸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상임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법조인이 필요하다면 보수와 진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인물, 대법원장 등 다른 자리를 탐하지 않을 인물, 마지막 공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이 맡는 게 옳다. 상임위원도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 추천 인물 중 여야 합의로 선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어떤 이슈에 대해 어떤 발언이 나왔는지 회의록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한 이는 스탈린이었다. 선거 관리, 선거 결과에 대한 시비와 불복 논란은 갈수록 첨예화할 것이다. 북한이나 중국의 해킹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AI)을 동원한 선거 개입 우려도 크다. 선관위 고위직 일탈, 특혜 채용 의혹은 외부 감사든 수사든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 다만 이게 새로운 권력에 의한 또 다른 선관위 장악 시도로 이어져선 곤란하다. 선관위가 권력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되면 대의민주주의가 기초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