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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때 공매도로 떼돈, 투자의 귀재일까 투기꾼일까

입력 | 2023-05-30 03:00:00

소설 ‘트러스트’로 퓰리처상
美작가 에르난 디아스 인터뷰
“가상의 인물 통해 돈 문제 다뤄… 돈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허상
돈에 우리 삶 결정되는 건 놀라워… 금융권에 대한 신뢰 다시 생각을”




미국의 투자가 앤드루 베벨은 20세기 초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를 호령했다. 베벨은 1929년 경제 대공황 시절, 주가가 떨어졌을 때 수익을 내는 공매도(주식을 빌려서 판 뒤 나중에 주식을 사서 갚는 것)를 해 큰 이익을 얻었다. 대공황 직후엔 망한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고 경제가 회복된 뒤 이를 비싼 값에 팔았다. 공격적인 투자로 떼돈을 번 수완가인 셈이다.

한편으로 베벨은 주식 시장 붕괴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정확한 시점에 공매도를 해 투자에 성공한 데엔 주가 조작 세력과의 결탁이 있지 않았겠냐는 것. 베벨은 1933년 뉴딜 정책 때 공매도를 시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비난도 받는다. 나라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보고 이에 투자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돈에 대해 쓰고 싶었다. 다행히 독자들이 그 결과물인 소설 ‘트러스트’에 호응했다”고 밝혔다. ⓒPascal Perich 

베벨을 ‘투자의 귀재’와 ‘투기꾼’ 중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그 둘을 구분하는 게 가능은 할까. 아르헨티나 출신 미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50)는 올해 2월 국내 출간된 장편소설 ‘트러스트’(문학동네·사진)에서 가상의 인물 베벨을 통해 돈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다룬다. ‘트러스트’는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올해의 책에 선정됐고, 디아스는 이달 8일(현지 시간) 미국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으로 금융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 디아스의 퓰리처상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나오며 화제가 되고 있다.

디아스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난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 SVB 파산이 수상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트러스트’를 읽으며 금융권의 신뢰에 대해 생각하게 된 사람이 많다. 소설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디아스는 2017년 소설 ‘먼 곳에서’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먼 곳에서’는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두 번째 작품 ‘트러스트’로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디아스가 소설 제목을 ‘트러스트’로 정한 건 돈이 곧 신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금융 시스템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다”며 “돈은 사람들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경험한 많은 금융위기를 생각해 보라. 신뢰가 무너진 뒤 우리는 얼마나 비참해졌나. 우리의 삶이 허상인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소설에서 베벨을 다양한 시각으로 다룬다. 1부는 한 소설가의 시선에서 진행되는데, 소설가는 베벨의 공매도를 ‘장난질’로 규정한다. 반면 베벨이 쓴 자서전 버전인 2부에선 베벨이 자신은 투자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변호한다. 독특한 건 베벨의 비서가 집필한 3부와 베벨의 아내가 쓴 4부에서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독자는 베벨을 단순히 지지 혹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디아스는 “세상의 진실은 복잡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만을 신뢰한다. 선입견이 무너진 뒤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며 “내가 사랑하는 일본 영화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의 영화 ‘라쇼몽’(1950년)처럼 관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뒤 디아스는 일약 영미 문학의 스타가 됐다. 소감을 묻자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전 그동안 고독하게 혼자 일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작품을 쓰겠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