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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론/김중권]느린 ‘법원의 시계’를 어떻게 수리할 것인가

입력 | 2023-05-30 03:00:00

심각한 재판 지연 상황, ‘사법 실패’로 평가 가능
결국 재판 시스템 문제, 사법 절차 간소화해야
겸직판사제, 재판지연보상법도 도입 필요하다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재판은 유리한 결과를 거두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 하는, 매우 고단한 과정이다. 실체적 정의를 밝혀야 해서 재판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연이 되면, 당사자는 승소했든 패소했든 불만에 가득 찬다.

재판에서 실체적 정의의 실현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간이다. 즐거움과 행동은 시간을 짧게 느끼게 한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뒤집어 보면 고달프고 힘든 일일수록 그 시간을 짧게 가져가야 한다. 심각한 재판 지연의 상황에 관한 일련의 기사들이 보여주듯이, 현재의 재판 지연의 상황은 ‘재판 실패’나 ‘사법 실패’라 평가된다. 개인의 자력구제 금지를 터 잡아 근대국가의 사법권이 성립하였는데, 심각한 재판 지연의 상황에서 자칫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용납되지 않는, 불법적인 개인의 자력구제가 선호될 수 있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하면서 개인이 적극적으로 자력구제에 나서는 상황은 ‘민주적 법치국가의 루비콘강’을 넘어선 것이어서 국가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례적으로 우리 헌법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국민의 재판청구권의 내용으로 두고 있다(제27조 제3항).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하면 이 헌법 조항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청구권을 직접 발생시키지는 않으며,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구체적인 입법 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민이 공감하는 입법적 해결책이 강구되지 않았다. 심각한 재판 지연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의례적으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경구에 덧붙여 이 규정의 존재가 상기될 뿐이다. 재판 지연의 문제가 개별 재판이나 판사의 문제가 아닌 점에서 지금의 상황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심각한 입법 해태이다.

현재의 법질서는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졌기에, 디지털 시대와의 심각한 불화는 당연하다. 최신 정보기술(IT)도 기본 프레임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법제도 일반은 깊은 자기 고민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재판 지연의 문제는 전체 법제도 및 사법 시스템 차원의 문제이다. 누구든 어렵지 않게 공인전문가 못지않은 전문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법제도는 더 이상 법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저해하지 않는 이상, 기왕의 사법 절차에서 제거하거나 축소할 부분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사법 절차를 과감하게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

판사 1인당 처리 사건 수에서 독일을 비롯한 여러 선진 국가와 비교할 바가 아니어서, 조직 확대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판사 증원은 분명 핵심적인 해결 방안이다. 다만 판사 증원의 문제를 직업판사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곤란하다. 독일의 경우 광범한 겸직(명예)판사제를 운용한다. 가령 노동 사건의 제1심 재판부는 1인의 직업판사와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에서 추천한 2명의 겸직판사로 구성되고, 최고심인 연방노동법원의 재판부는 3인의 직업판사와 2인의 겸직판사로 구성된다. 한정된 사법 자원의 효과적 운용, 재판의 민주적 정당성의 제고 및 재판에 대한 공감대 확산을 위하여 독일의 경우처럼 겸직판사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기왕의 사법부 체제에서 판사 증원만을 강구하면 자칫 사법부 특유의 위계질서가 더욱 강고해질 수 있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힘의 분산을 위해, 대법관을 증원하고 대법원의 구조를 일반(민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와 특별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로 전문화,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

사법 스스로 국민의 곱지 않은 시선을 제도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인 방책이 재판지연보상법의 마련이다. 독일은 우리 국가배상법에 해당하는 그들 민법 제839조 제2문이 재판 지연에 따른 국가배상책임의 가능성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와 별도로 재판지연보상법을 2011년에 제정하였다. 손실보상을 인정하는 잣대인 재판 지연의 과도함을 법원이 판단하여 그 실효성이 문제될 수 있지만, 자신의 재판을 동료가 다시금 살펴본다는 그 자체로 판사들 사이에 건강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판사 스스로 자기 경계를 다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판사는 당사자의 의도적인 재판 지연 모색을 이 법을 내세워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21 한눈에 보는 정부 보고서’에 의하면 사법 서비스 만족도가 OECD 평균이 57%인데 우리는 22%에 불과하다. 1963년 제3공화국 헌법에서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잠자고 있는,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시간의 의미가 완전히 변모한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깨울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