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 문화전문기자
흔히 인용되는 라틴어 경구(警句)가 셋 있다. 경구라는 말에 ‘경고’의 의미가 있으니 셋 모두 명령형 문장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한글로는 다섯 자인 것도 똑같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지금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다. 마지막 경구는 한국의 대중 사이에서 유독 인지도가 높다.
그레고리오 성가 ‘디에스 이레’의 중세 악보(위)와 이를 현대식으로 적은 악보. 근대의 여러 작곡가가 이 선율을 자신의 작품 속에 삽입했다. 동아일보DB
고금의 여러 작곡가가 이 선율 또는 음형을 자신의 작품 속에 인용했다. 특별한 배경 없이 삽입한 경우도 있지만, 명백히 ‘죽음’이나 ‘멸망’을 표제로 둔 곡도 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리스트의 ‘죽음의 춤’, 차이콥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 등이 이 음형을 담은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선율을 문득 떠올린 것은 올해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펼쳐지는 그의 작품 열풍 때문이었다. 최근 자주 연주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일종의 변주곡이다. 예의 ‘디에스 이레’도 삽입되는데, 이 곡에서 가장 인기 높은 부분은 18번째 변주다. 파가니니의 무반주 바이올린 카프리스 24번에서 따온 곡 첫머리의 주제와는 동떨어진 선율처럼 들리지만 달콤하고 감상적인 멜로디 덕에 영화나 광고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인다.
‘변주곡인데 왜 주제와 상관없는 선율이 나올까’라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이 선율도 파가니니 주제의 변주다. 엄밀히는 상하반전(인버전·inversion)이다. 주제의 ‘라-도-시-라-미’를 아래위로 뒤집으면 ‘솔-미-파-솔-도’가 된다. 왜 ‘미-도-레-미-라’가 아니라 ‘솔-미-파-솔-도’일까? 피아노 건반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음계 안의 모든 음은 ‘레’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기자는 실험을 통한 연역적(演繹的) 방법의 발견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디에스 이레’ 동기에 집착했고 인버전 기법을 활용한 작곡가라면 디에스 이레의 인버전도 작품 어딘가에 넣지 않았을까? 여기까지가 가설이다.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다. ‘디에스 이레’의 ‘도-시-도-라-시-솔-라’를 아래위로 뒤집으면(인버전) ‘미-파-미-솔-파-라-솔’이 된다. 이 패턴의 일부를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가설은 사실로 입증될 것이다.
실험은 쉽게 끝났다. 아래위를 뒤집은 진행을 떠올리자마자 머릿속에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1악장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피아노의 노래를 오보에가 받아 반복하는 애상적인 부분의 선율이 ‘미-파-미-솔-파’로 흐른다.
사족, 죽음의 선율에 평생 사로잡혔던 라흐마니노프는 1943년 만 70세 생일 직전에 생을 마쳤다. 당시 기준으로 짧은 삶은 아니었다.
사족2, 국내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불운에 빠질 때마다 관현악의 총합주와 함께 굉음처럼 터져 나오는 합창은 베르디의 레퀴엠(장송 미사곡) 중 ‘디에스 이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디에스 이레’와 같은 가사지만 선율은 다르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