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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한강다리서 전화하니 ‘햇볕 쬐라’ 말만”… 외면받는 정부상담소

입력 | 2023-05-31 03:00:00

위기 청소년 온라인상담 부실 운영
복지센터 등 연계지원 0.6%에 그쳐
“형식적 조언뿐… 더는 이용 안해”
전문가 “또래 자조모임 활성화를”




“한강 다리 건너다 정말 큰 용기를 내 전화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 활동도 하고 햇볕도 쬐라’는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이모 양(17)은 지난해 말 학교를 자퇴한 뒤 수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올 초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극단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한강대교를 걷던 이 양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청소년사이버상담센터에 전화했다. 이 양은 “너무 힘들어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한다고 말했는데 돌아온 건 형식적 조언뿐이었다”고 했다.

그를 멈추게 한 건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우울증갤러리(울갤)에서 알게 된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김 양은 “SNS 게시글을 보고 먼저 전화를 걸어 준 친구 덕분에 그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사이버 아웃리치’ 1000건 중 6건만 연계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구에서 한 여학생이 자신의 극단적 선택 장면을 생중계하면서 해당 학생이 활동했던 인터넷 커뮤니티 울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인터뷰한 울갤 이용자 12명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청소년 상담 프로그램에서 제대로 도움을 못 받아 울갤을 다시 찾게 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여성가족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인 2020년 9월 우울감을 느끼는 청소년 등을 위해 ‘사이버 아웃리치’(찾아가는 온라인 상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여가부의 해당 사업 실적에 따르면 도입 첫해인 2020년 9∼12월의 경우 총 8484건의 상담 중 복지센터나 쉼터 등에 연계돼 지속적 지원으로 이어진 경우가 2807건(33.1%)에 달했다. 하지만 연계율은 2021년 3.8%, 2022년 7% 등으로 추락했고 올해는 1∼4월 기준으로 0.6%에 그쳤다. 1000건 중 6건만 관계기관에 연계된 것이다.

이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청소년들로부터 “상담이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는 평가가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모 양(14)은 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앱)과 SNS에 올라온 홍보 글을 보고 먼저 말을 걸었는데 자신의 얘기를 하기도 전 상담사가 사는 곳을 묻더니 “거주지 근처 청소년 쉼터를 방문해 보라”는 말만 반복해 채팅을 중단하고 나왔다고 했다.

이모 군(17)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새벽에 집에서 나와 인터넷에 ‘잘 곳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는데 채팅을 걸어온 상담사는 대안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연계율 하락에 대해 “아이들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싶은 시스템을 계속 고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전문가 “또래 자조모임 활성화 필요”
정부와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대면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실질적 도움을 못 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서울 중구에 거주하는 김모 양(18)은 지난해 학교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우울감이 커져 교육부와 학교에서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 ‘위(Wee)클래스’에 참여했다. 그런데 상담 교사는 위클래스 연계 기관에서 진행하는 ‘코딩 배우기’ 프로그램 등을 권했을 뿐 김 양의 상황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안 했다고 한다. 김 양은 “수업에 들어가기 싫을 때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사용하다 결국 그만뒀다”고 했다. 가정 폭력을 당해 청소년 쉼터에 들어갔는데 폭력을 자행한 부모가 알고 찾아와 쉼터를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공급자가 아닌 청소년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옥식 한국청소년폭력연구소장은 “위기에 처한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건 본인과 비슷한 처지인 이들과의 지속적 모임”이라며 “또래 자조모임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미송 기자 cm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