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돌보느라 빈곤 악순환 ‘돌봄 청년들’ 그들을 돕는 ‘새파란 돌봄’ 조기현 작가의 이야기
조기현 돌봄커뮤니티 ‘n인분’ 대표
4월 어느 날,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한 건물로 들어간다. 건물 사무실에서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돌봄청년커뮤니티인 ‘n인분’의 대표이자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을 집필한 조기현 작가였다.
영케어러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련 활동을 하는 조기현 작가. 조기현 작가 제공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12년간 돌보며…‘n인분’의 시작
“조기현님 핸드폰 맞나요? 아버님이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오셨어요!”12년 전 20살이었던 조 작가는 일하다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담당 의사는 “응급수술을 들어가야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야 하는데 어머니는 안 오시나?”라고 물었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해 따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건축 미장일을 하셨고 조 작가 또한 생계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을 했다.
당시 현행법상 수술 동의서와 입원수속은 만 24세가 넘는 ‘성인’만 할 수 있었고 만 19세였던 조 작가는 병원 수속도 못 했다고 한다. 막막하게 응급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조 작가 앞에 아버지의 동료가 나타났고 조 작가의 아버지는 극적으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수술을 마친 조 작가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미장일을 할 수 없었다. ‘쓸모없다’는 자괴감에 휩싸인 아버지는 집에서 술만 마셨고, 알코올 의존증과 당뇨 합병증까지 겹쳐 조 작가가 생계유지와 집안일을 동시에 했다고 한다.
삶이 너무 힘들어 조 작가는 국가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그는 “아버지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자 구청에 돌봄 서비스를 신청하러 갔다. 하지만 어머니와 금전거래 내역이 있다는 점과 제가 공장에서 주·야간 일하면서 180만 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막막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치매 증상까지 보였다고 한다. 조 작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을 받기 위해 인력사무소에 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몇 년 동안 쓰지 않던 장비를 들고 일을 나가야 한다면서 나갈 채비를 하셨다. 아버지의 동료들한테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라고 했다. 그는 이후 일주일간 일을 나가지 않고 아버지를 지켜봤고 아버지가 치매 초기 증상 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조 작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치매 등급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치매 환자가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치매 판정에 필요한 문제를 다 풀어냈고, 치매 등급을 받는 데 실패했다. 조 작가는 “치매 등급을 받지 못하면서 국가 돌봄 서비스 신청도 다시 탈락했다. 생계를 위해 제가 일을 나갔을 때 아버지가 사고로 화상을 입기도 해서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고 회상했다.
관련 강연을 하고 있는 조기현 작가. 조기현 작가 제공
조 작가는 끝없는 좌절감에 휩싸였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주소 이동을 했고 아버지를 1인 가구로 만든 뒤에야 기초수급생활자 신청과 국가 돌봄 서비스를 신청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조 작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같은 영케어러들의 목소리를 듣다
“저같이 젊은 나이에 병든 가족들을 돌보고 국가의 지원을 못 받는 영케어러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케어러들이 돌봄 지원을 신청하는 동사무소나 보건소 그리고 병원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도 했어요.”“영케어러들은 자신의 고충을 주변에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말해봤자 ‘효자구나!’라고 한마디 하고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않으니깐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 관련 연설을 하는 조기현 작가. 조기현 작가 제공
조 작가는 이에 영케어러들을 포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돌봄 경험을 알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영케어러 경험담을 적어낸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판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겪었던 심정, 고충을 책에 적어내자 이를 읽고 전국 각지에서 영케어러들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영케어러들을 대변하자
“저 같은 영케어러들이 관련 법안이 공포돼 국가의 지원을 받기 전까지 버틸 수 있도록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조 작가는 영케어러들의 자조모임을 열어가면서 돌봄청년커뮤니티 ‘n인분’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영케어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7살 때부터 조현병에 걸린 어머니를 20년간 돌봐온 사람, 10년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혼자 돌봐온 손자, 자신을 거둬준 양부모가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13살 때부터 지금까지 돌봐온 여성 등 조 작가는 매달 전국의 영케어러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조 작가는 ‘n인분’을 운영하면서 영케어러들에 대한 법적 지원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5년 전만 해도 영케어러들에 대한 지원은 꿈도 못꿨다. 하지만 소위 ‘간병살인’ 사건으로 영케어러들에 대한 지원 법안이 급물살을 탔다”고 말했다.
2020년 발생한 ‘간병살인’은 20대 청년 B 씨가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아버지를 방치해 살해한 사건이다.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가 6개월 만에 경제적인 이유로 퇴원했지만, B 씨는 월세, 가스비, 전기료, 통신비, 인터넷 이용료도 못 낼 정도의 생활고를 겪었고, 좌절감에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에서 이렇다 할 지원을 받지 못한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던 사실 또한 뒤늦게 밝혀졌다.
영케어러 실태 조사에 참여한 조기현 작가. 조기현 작가 제공
이후 정부는 2022년 영케어러에 대한 실태조사를 보건복지부에 지시했고 조 작가는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케어러 자조모임 회원들과 지속적으로 자문 역할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난 2023년 3월 24일 영케어러 지원법인 ‘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이 발의됐다.
조 작가는 영케어러에 대한 법안이 완전히 공포되고 제대로 된 지원이 시작될 때까지 자조모임과 돌봄청년커뮤니티 ‘n인분’을 적극 이끌어나갈 계획이다. 그는 “영케어러의 대부분이 ‘돌봄’과 집안일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청년들이 가족들로 인해 꿈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어야 된다”라며 관련 활동을 더 늘릴 각오를 내비쳤다.
영케어러가 한국만의 문제?
유로케어러스(Eurocarers)와 화상 교류를 준비하고 있는 조기현 대표. 조기현 대표 제공
영케어러 문제는 한국만 있는 게 아니다. 영케어러의 어원을 정의한 영국과 호주는 정부 차원의 조사를 통해 각각 49만, 23만 명의 영케어러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들이 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원을 하고 있다. 영케어러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던 일본 또한 2021년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2022년부터 적극적으로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유럽 선진국들 또한 EU를 중심으로 10년 동안 영케어러와 관련한 사례를 연구하고 법적 근거를 마련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조 작가는 이같은 선진국들의 영케어러 정책을 배워오고자 국제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유럽에서 영케어러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유로케어러스(Eurocarers)와의 교류를 시작으로 향후 영국, 일본 영케어러 단체와 교류를 하며 영케어러들을 위한 정책의 노하우를 배워 오겠다는 게 조 작가의 의도다.
세상에 하고 싶은 말
“앞으로 영케어러 문제는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 문제가 지속될수록 심각해질겁니다.”조 작가는 최근 아이를 낳는 부모들의 연령대가 높아지는 현상을 지적하며 영케어러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를 낳는 부모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아이가 영케어러가 될 확률은 높아진다”며 “이들의 문제를 두고만 본다면 많은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줄 것이고 국가발전에도 큰 영향을 줄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조기현 돌봄커뮤니티 ‘n인분’ 대표
조 작가는 영케어러에 대한 한국의 현실과 관련해선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용기 있게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나이가 어린 친구들은 자신의 동기들에게 ‘부모가 신체적 장애가 있다’고 알려졌을 경우 놀림을 받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타인에게 자신의 상황을 잘 알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런 현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련 활동을 더 늘리고자 한다.
조 작가는 돌봄커뮤니티 ‘n인분’ 활동과 자조모임이 단순히 영케어러들의 실태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저 같은 사람들을 찾는 데 힘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들이 이 상황을 타파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주는 데 힘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전했다.
그는 “언젠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최재호 동아닷컴 기자 cjh12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