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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진영]‘박원순 사태’에도 흔들리지 않은 비결

입력 | 2023-05-31 21:30:00

폭력과 싸워온 ‘한국여성의전화’ 40주년
“성폭력 부정주의는 민주도 진보도 아냐”



이진영 논설위원


여성운동가 달력의 기념일은 다르다. 1월 16일은 영국 BBC가 미인대회 중계를 거부한 날(1984년), 3월 2일은 호주제 폐지 법안 통과일(2005년), 4월 22일은 여성 은행원 결혼 퇴직 각서제가 폐지된 날(1976년), 그리고 1983년 6월 11일은 국내 첫 진보 여성단체가 창립한 날이다.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한국여성의전화다.

창립식 축사에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개탄했듯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몹쓸 짓이라도 모르는 척하는 게 미덕”이던 시절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전화 상담에서 시작해 1987년 국내 최초의 가정폭력 긴급피난처인 ‘쉼터’를 개설했고 성폭력, 스토킹, 데이트폭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40년간 전화 상담이 114만 건(연간 2만8500건), 쉼터를 거쳐 간 여성이 74만6000명이다. 2003년 여성의전화에 합류한 송란희 공동대표는 “40년 역사가 자랑스러우면서도 똑같은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어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여성의전화가 도운 피해자 중엔 한국 여성운동사에 기록될 이들이 많다.

“1988년 주부가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자른 사건이 있었다. 성폭력 정당방위를 처음으로 인정받아 무죄가 됐다. 1991년엔 9세 때 성폭력당한 여성이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살해한 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는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0년간 폭행해온 남편을 죽인 여성이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1997년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해자도 있다. 여성의전화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피해자 지원에 앞장서 박 시장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들었다.

“피해자를 돕는 것이 우리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믿었다. 다행히 후원금이 줄지 않았다. 시민들이 지지 의사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긴 다큐 영화가 다음 달 개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의전화는 “당장 멈추라”는 성명을 냈다. “막무가내 ‘성폭력 부정주의’는 민주도 진보도 아니다. 의리도 아니다. 패악질일 뿐이다.”

―여성의전화 출신 중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가 드물다.

“내부 규정에 따라 정계 및 공직에 진출하려면 조직 내 합의를 거쳐야 하고, 공천 신청 전 사퇴해야 하며, 공천을 못 받거나 낙선했을 때 1년 안에 조직에 돌아올 수 없고, 돌아와서도 총회의 의결을 거친 뒤 활동할 수 있다. 배우자가 출마하면 두 달 전 휴직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때 만든 규정이다. 정치 바람을 타면 피해자 보호에 지장이 있을까봐 엄격하게 선을 그어놓았다.”

―시민단체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재정적인 독립이다. 상담소와 쉼터 운영에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 그 비중을 총수입의 30% 이하로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야 조직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나갈 수 있다.”

―40년간 별 탈 없이 운영해온 비결이 무엇인가.

“피해자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었던 것, 그게 정신 차리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이 86명, 살인 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이 225명이다. 폭력으로 삶이 부서지는 위기의 여성들 곁을 지키며 안전한 세상을 위해 헌신해온 한국여성의전화 40돌을 축하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