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행사 후 재표결로 법안 부결 잇따라 상대 인정, 타협하는 것이 거부권 본래 취지 여야, 지지자 집결 수단으로 제도 이용 말아야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통령의 거부권은 헌법 제53조에 명시된 국회를 견제하는 권한이다. 정식 명칭은 재의요구권이며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을 다시 한번 논의해 달라는 대통령의 요구 권한이다. 거부권이 행사된 법안에 대해 국회는 재표결을 시도하거나 다시 상정하지 않고 국회 임기 종료 시 폐기시키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만일 재표결을 해서 재적 의원 과반수가 출석하고 출석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다면 거부권에 관계없이 법률로 확정된다. 헌법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을 보장한 것은 국회의 입법권이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재의가 요구된 법안에 대해 출석 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부권 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을 보자. 첫째로 권력구도의 문제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부권 행사의 가능성이 높다. 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의회에서 여당의 강한 반대를 무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면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를 고려하게 된다. 민주화 이후 16차례의 거부권 행사 중 13번이 여소야대 상황에서 발생했다. 물론 여당이 다수당인 정치 상황에서도 거부권이 발휘되기도 한다. 대통령의 지지가 낮고 권위가 떨어졌을 때 여당 주도의 국회가 대통령이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시점에 여당인 새누리당이 다수당이었다.
둘째로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이 거부권 행사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대통령의 정치 경험이 적은 경우에 거부권 행사가 빈번하다. 일반적인 조직에서는 효율성과 일사불란함이 덕목이 되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다양성과 타협이 기본 가치라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익숙하지 못한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로서 자신의 정치철학과 다른 의견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신념이 강할 때 거부권 행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야당 후보로 당선된 대통령은 이전 정권의 폐해를 청산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야당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법안에 우호적일 이유가 별로 없다.
의회가 통과시키려는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반대할 경우에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 의지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그러면 의회는 대통령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면 대통령은 의회에서 재의결시킬 가능성 여부를 따진다. 만일 재의결될 가능성이 있다면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재의결은 대통령의 명성에 큰 흠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통령의 거부권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대통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의회는 입법에 더욱 신중해지고 마찬가지로 대통령도 거부권 행사에 신중해진다는 사실이다. 거부권과 재의결이라는 제도적 권한이 사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자들에게 내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에 이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두 법안의 심의 과정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법안 모두 상임위원회에서 여당 의원들이 퇴장한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처리해서 통과시켰다. 또한 해당 상임위에서 본회의 직부의를 결정해서 법제사법위원회를 패싱했다는 점도 같다. 마지막으로 거부권이 행사된 두 법안 모두가 재표결을 거치면서 부결되었다.
한국 정치의 현실은 거부권의 진정한 기대효과와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여야당은 공히 지지자 집결을 위해 거부권과 재표결의 기회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야당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확실한 법안을 여당과 타협 없이 통과시키고 거부권 이후 다시 재표결을 시도했다. 국회를 무시하는 독단적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비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대통령은 야당 의석이 3분의 2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된 법안이 재의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거침없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 입법이 계속 좌절된다면 의회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이 걱정된다. 제도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고 원래의 취지를 되새겨야 한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