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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북향이 16억 원… 31년 만에 최고가 찍은 도쿄 아파트[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 2023-06-01 03:00:00

일본 도쿄의 아파트 가격이 거품 경제 붕괴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오르면서 자산 시장이 달아오르고 있다. 초저금리 장기화에 따른 가격 상승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은 오히려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본 도쿄의 2020 도쿄 올림픽 선수촌을 리모델링한 아파트 단지 ‘하루미 플래그’.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 고토구 아리아케(有明)에서 15년째 살고 있는 회사원 마쓰모토 씨(49)는 요즘 집 근처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을 볼 때면 기분이 묘하다. 그가 이사 온 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곳 집값은 대부분 떨어졌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올림픽 체육관, 대규모 쇼핑몰 및 공연장이 잇따라 들어서며 개발 열풍이 불어 수억 엔(수십억 원)짜리 아파트가 지어지기 무섭게 팔린다. 마쓰모토 씨는 “‘거품 붕괴’ 이후 아파트는 사면 손해라고 생각해 계속 월세로 지냈는데 요즘에는 빚을 내서라도 내 집을 장만하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고 말했다.》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30년간 침체 일로를 걷던 일본 자산 시장이 달라지고 있다. 인기 아파트 분양 경쟁률이 수백 대 1까지 치솟는가 하면, 도쿄는 물론이고 인근 수도권까지 가격이 오르면서 자산 가치 상승을 실감하고 있다.

10년 새 2배로 오른 아파트값
2020년 도쿄 올림픽 때 선수촌으로 쓰인 아파트 단지 ‘하루미 플래그’. 도쿄 도심 긴자에서 4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입지로 주목받으며 최근 일부 평형은 경쟁률 266 대 1을 기록했다.

사실 이곳은 가장 가까운 전철역까지 20분 이상 걸어가야 할 정도로 교통이 불편한 데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인공 섬’이어서 지진에 약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동안 창고 용도로 쓰이거나 공터로 방치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개발 가능한 넓은 땅이 남아 있었기에 대규모 올림픽 선수촌을 조성할 수 있었다.

기자가 지난달 30일 찾았을 때 하루미 플래그는 올가을 준공을 앞두고 조경과 인도 조성을 비롯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건설업체 직원은 “전철역이 멀긴 해도 시내버스로 10분이면 도심에 갈 수 있는 요지(要地)”라고 소개했다.

선수촌뿐 아니다. 주변 아파트도 인기가 높다. 이 지역 부동산중개업소에는 2005년 준공으로 방 2개에 거실, 주방이 있는 전용면적 86㎡ 24층 아파트를 1억3389만 엔(약 13억 원)에, 8월 준공하는 방 3개짜리 전용 69㎡ 23층 북향 아파트를 1억6600만 엔(약 16억 원)에 판매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새 아파트라 해도 1년 내내 해가 들지 않는 북향집을 누가 살까 싶지만 공인중개사 사무실 직원은 “남향은 2억 엔이 넘기 때문에 저렴한 집을 찾는 수요자 문의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 일본 대기업 임원은 “10년 전 8000만 엔(약 8억 원)에 아파트를 샀는데 최근 거주하는 동(棟)의 한 집이 1억5000만 엔에 매매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파트값이 오르는 건 거품 경제 때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다”고 말했다.

올 1분기 부동산 투자액 세계 2위
일본 아파트 가격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특히 도쿄 중심부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올랐다. 일본 부동산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신축 아파트 평균 가격(6288만 엔)은 1991년 이후 3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경신했다. 집값이 비싼 도쿄 도심 6개 지역만 따져보면 아파트 평균 가격(신축 제외)은 9800만 엔이다. 5000만 엔대 초반이던 2012년과 비교해 10년 새 2배 가까이로 올랐다.

마쓰다 다다시 부동산경제연구소 주임 연구원은 “(코로나19 이후) 자재값 상승으로 공사 비용이 늘어났고 전철 환승역세권같이 입지가 좋은 지역 위주로 아파트 공급이 이뤄지고 있다”고 가격 상승 요인을 분석했다.

일본에서는 1억 엔 넘는 아파트를 1억 엔과 맨션의 합성어인 ‘억션’이라고 부른다. 억션은 과거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도 구매 가능한 부동산 물건이 됐다.

도쿄 도심에서만 찾아볼 수 있던 억션은 이제 홋카이도 후쿠오카 오키나와 같은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수도권 외곽 등에 저렴한 가격으로 넓은 집을 사려는 수요가 반짝 생긴 적이 있지만 직주(職住) 근접성을 노리고 도심의 집을 구매하려는 수요를 꺾진 못했다.

글로벌 부동산 업체 존스랭라샐(JLL) 보고서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도쿄를 비롯한 일본 수도권 부동산 투자액(48억 달러)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세계 2위다.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미국 뉴욕을 제쳤다. “미국 유럽의 금리 인상으로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엔화를 조달해 부동산에 투자하는 해외 자본이 늘어났다”고 JLL 측은 설명했다.

세계 최저 금리가 올린 자산 가격
일본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린 가장 큰 ‘동력’은 세계 최저 수준 금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기준금리는 연 ―0.1%로 연 5.0∼5.25%인 미국 기준금리와 격차가 크다. 올 4월 일본은행 총재가 교체되면서 금리 인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당분간 금리를 올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으면서 아베 신조 전 정권 때 시작된 ‘아베노믹스’의 자산 가격 인상 효과가 최근 극대화된 모습이다.

일본은 금리가 워낙 낮아 거액의 부동산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쉽다. 일본 가나가와현 공인중개사 나은선 씨는 “웬만한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라면 주택에 따라 연 0.3∼0.7%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자영업자도 연 1.5∼1.7%에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에 따라서는 연봉의 10배까지 대출해 주기도 한다.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일본 집값은 오르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강해 부동산 구매를 꺼리던 사람들도 최근 몇 년 새 집값이 오르는 것을 보면서 비싼 아파트를 사는 데 큰 거부감이 없다.

자산 가격 상승은 부동산에만 그치지 않는다. 닛케이평균주가(5월 30일 기준 3만1328.16엔)가 33년 만에 최고가 행진을 이어가며 증시도 활황이다. 닛케이평균주가는 올 들어서만 21%가량 상승했다.

일본 초저금리가 본격화된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이른바 ‘와타나베 부인’도 글로벌 외환시장에 20여 년 만에 재등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때 외환 거래를 했던 중장년층 개인투자자로부터 ‘계좌번호를 확인하고 싶다’ ‘비밀번호를 까먹었다’는 문의 전화가 잇따르고 있다”며 “엔화 환율이 요동치고 미국 유럽 금리가 크게 상승하는 상황이 외환 투자자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이 같은 자산 가격 상승이 서민 생활까지 윤택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임금 인상이 동반되지 않은 자산 가격 급등은 한국 등에서 보여주듯 빈부 격차를 더 크게 하고 결국 사회 양극화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는 올 초 일본 도요게이자이신문 기고에서 “일본 경제 당면 과제는 잠재성장률 저하를 막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자산 가격 상승이 일본 경제 부활의 전조가 될지, 양극화 확대만으로 끝날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