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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손효림]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말하는 이들에게서 빛을 보다

입력 | 2023-06-01 21:30:00

日 교수, 윤동주 詩碑 건립 무산되자 방한해 후원금 반환
사죄에 후원자도 고개 숙여… 의미있는 실패, 새 싹 틔울 것



손효림 문화부장


“호텔 로비에서부터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면목 없고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셨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원한 순천향대 의대 명예교수(74)는 지난달 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78)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를 만난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숨진 일본 규슈 옛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시비(詩碑)를 세우는 일을 2015년부터 해 온 니시오카 교수는 관할 구청의 불허로 건립이 최종 무산되자 한국인 30여 명이 전한 1000만 원가량의 후원금을 돌려주려 한국을 찾은 것. 봉투에는 5만 원짜리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신 교수가 건넨 100만 원 그대로였다. 사죄하는 편지와 시비 건립 추진 경과를 날짜별로 쓴 A4 용지 2장도 있었다. 신 교수는 “교수님이 한 시간 늦었는데 알고 보니 서울 종로구, 인천 강화도에 사는 분에게 후원금을 각각 돌려주고 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장호병 수필가(71)도 이튿날 대구로 온 니시오카 교수로부터 후원금을 돌려받았다. 장 작가가 대구문인협회장이던 2017년, 문인 10여 명과 전달한 것이었다.

“봉투에 9만2000엔과 5만 원, 1만 원권으로 총 410만 원이 있었어요. 당시 100만 원을 엔화로 환전해 계좌로 보낸 분이 있었는데 이를 엔화 그대로 갖고 오신 거죠.”(장 작가)

도쿄 호세이대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니시오카 교수는 1981년 한국으로 와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10여 년 강의하다 199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윤동주의 시에 매료된 그는 연세대 교정에서 윤동주 시비를 보고 자신의 고향에서 시인이 운명한 사실을 몰랐던 것을 참회했다. 이에 1994년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매달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매년 위령제를 지낸다.

일본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 도시샤대와 하숙집 터(현 교토조형대), 친구들과 소풍 갔던 교토 인근 마을 우지에 시비가 각각 있다. 니시오카 교수가 후쿠오카에 시비를 세우려 한 건 시인이 마지막 머문 곳에 그가 존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원자들은 8년간은 물론 지난달 3박 4일 한국을 방문한 데 든 비용을 니시오카 교수가 부담한 것을 미안해했다. 돈을 안 받으려 했지만 “저승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으로 윤동주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노 교수의 말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니시오카 교수는 한국까지 온 데 대해 “후원금을 만나서 받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고 돌려드려야 한다”고 했다. 후원금을 활동비로 쓰지 않은 이유는 뭘까.

“시비가 건립됐다면 당당히 활동비를 정산했겠지만, 이를 이루지 못했기에 돌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통비 등을 챙겨 주신 분도 있어 그동안 제가 쓴 돈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윤동주를 알게 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게 뭔지 배웠습니다. 윤동주의 고국에는 ‘윤동주 정신’을 가진 분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후원금을 돌려주는 이도, 받는 이도 가장 많이 한 말은 “부끄럽다, 미안하다”였다.

“한국인도 안 하는 일에 일본인이 헌신적으로 나서는 걸 보며 부끄러웠습니다.”(신 교수) “이 돈은 미안해서 그냥 쓸 수 없습니다. 시비 건립 추진 과정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장 작가)

시비는 세우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실패는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