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씨가 경기 남양주체육문화센터 테니스코트에서 백핸드 발리로 공을 넘기고 있다. 1990년대 말 군인인 남편을 따라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 그는 국내 아마추어 최강으로 군림한 뒤 이젠 즐기는 테니스로 행복한 100세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양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양종구 기자
“솔직히 1위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테니스가 좋았고 열심히 훈련하고 대회에 출전했더니 3개 단체 1위가 돼 있더라고요. 기뻤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테니스를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 때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창출해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2002년. 남편이 대전 유성에서 교육받을 일이 있어 갔을 때 군인 가족 친선테니스대회에 출전했는데 초반에 탈락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 스스로 잘한다고 자만했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았다. 당시 인천 부평에 살 때였는데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해 아이들 학교 갈 때 함께 ‘출근 도장’을 찍으며 훈련했다. 거의 매일 테니스를 쳤다”고 회상했다.
“개나리부 우승은 국화부로의 승격을 의미합니다. 개나리부에 출전하는 모든 사람은 국화부가 되려고 간절하게 노력해요. 하지만 우승하지 못하면 국화부에 낄 수가 없어요. 전 2년 반 만에 국화부에 올라갔습니다. 10년을 해도 국화부에 못 오르는 분도 많아요.”
국화부에 올라가자마자 6개월 만에 우승했다. 국화부 초보자라 베테랑과 나가서 거둔 성과였다.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챔피언이니 핸디캡을 적용해 하급 선수와 파트너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8강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계속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3위까지 올랐고, 우승도 했다. 또 우승하고…. 지금까지 우승 트로피만 100개 넘게 받았다”고 했다. 2011년 국민생활체육전국테니스연합회(현 대한테니스협회) 연말 랭킹 1위를 차지했다. 한국테니스발전협의회에서도 한때 연말 랭킹 1위를 했고 결국 2018년에 3개 단체 1위로 올라선 것이다.
“테니스를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전업주부지만 취미 활동으로 사회생활을 배운 것 같고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대인관계도 좋아졌어요. 인생 공부 많이 했어요. 물론 신체적 정신적 건강은 당연히 따라왔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은 김 씨에게 골프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테니스를 치지 못하게 하니 필드로 나가게 됐다. 테니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골프에서도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김 씨는 “2년여 ‘외도’ 기간에 76타까지 쳤다”고 했다. 아마추어 골퍼들의 꿈인 ‘싱글 스코어’다. 그는 “테니스도 재밌지만 골프가 주는 매력도 쏠쏠했다. 지금도 테니스가 최애(最愛) 스포츠지만 가끔 지인들과 골프도 즐긴다”고 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