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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심이 일으키는 전쟁,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반복된다[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입력 | 2023-06-02 03:00:00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이 하나 없어지는 것 같다.’ 이제 이 말은 흘러간 노랫말처럼 들린다. 21세기 과학·기술 시대의 노년은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미래를 보고 질주하는 시대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역사를 대하는 우리 시대의 태도도 비슷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과거사의 기억은 뒷전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망각된 역사는 쫓겨났던 뒷문으로 되돌아온다. 이를 누구보다 분명하게 의식했던 사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이다.》

패전 후 추방돼 전쟁 기록했던 장군

우리에게 더 친숙한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보자. 그가 쓴 ‘사기(史記)’는 전설 속 황제에서부터 한무제(漢武帝)까지 20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의 만리장성’이다. 사마천은 황제에서 자객까지, 온갖 인간들의 이야기로 긴 시간을 채워 넣었다. ‘사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또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사마천은 죄 없는 장수를 두둔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에게는 궁형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세의 치욕을 견디며 사마천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하나,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것”(‘사기’, ‘태사공자서’·김원중 옮김)이었다.

죄인 아닌 죄인, 사내 아닌 사내로서 육체적 고통과 치욕을 참으며 ‘사기’를 써내려간 사마천의 삶을 박경리는 아홉 행 짧은 시에 담았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긴 낮 밤을/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글을 썼던 사람/육체를 거세 당하고/인생을 거세 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마흔다섯에 한쪽 가슴을 잘라내고 타향의 외딴방에 자신을 유폐한 채 글쓰기에 몰두한 작가에게 ‘토지’는 또 하나의 ‘사기’가 아니었을까.

캐나다 토론토의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 있는 투키디데스(기원전 460년 경∼?) 흉상. 그는 모든 시대를 위한 ‘영원한 재산’으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남겼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투키디데스는 사마천보다 300여 년 앞서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다. 그 역시 불명예를 안고 살았지만, 사마천의 경우처럼 처절한 상황은 아니었다. 투키디데스는 서른 즈음 장군으로 선출되었지만 패전의 책임을 지고 아테나이에서 추방된 뒤 이국에서 전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런 개인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마천과 투키디데스가 역사를 쓴 목적은 똑같다.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역사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듣기에 재미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어난 일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 똑같거나 비슷하게 다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분명한 것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내가 쓴 것들을 유용하게 판단한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이 역사는 눈앞의 경연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영원한 재산으로서 엮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기록은 후대에 ‘영원한 재산’

도대체 무슨 근거로 투키디데스는 한 시대 전쟁의 기록이 ‘영원한 재산’이 되리라고 믿었을까? 2500년 전 그리스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할까?

그리스 문명의 역사는 세 차례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설로 남은 트로이아 전쟁은 원정에 함께 참여한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 주었다. 두 차례 페르시아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뒤 그들은 ‘50년’ 번영기를 누렸다. 하지만 번영의 끝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전쟁,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인들에게 ‘승리의 서사’였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몰락의 서사’였다.

필립 폴츠가 1852년에 그린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아테네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전쟁 발발 동시에 투키디데스는 그 의의를 간파했다. 이 전쟁은 두 적대국의 분쟁이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휘말린 ‘세계 대전’이었고 27년 동안 이어진 장기 전쟁이었다. 10년 트로이아 전쟁이나 “두 번의 해전과 두 번의 육상 전투”로 끝난 페르시아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사회를 내부로부터 해체했다. 외부 적들과의 전쟁은 국내 당파들의 내분을 초래했고 그 결과는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 형제와 형제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숨어 있던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역병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고통이 늘어났다. “내분 때문에 수많은 고통이 도시들을 덮쳤으니, 우연적 상황들의 변화가 제각각인 탓에 겉보기에 더함과 덜함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이 똑같은 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앞으로도 항상 일어날 것이다.” 비극의 목격자 투키디데스의 경고이다.





전쟁사에 숨겨진 보편적 ‘진리’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런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학’에서 “역사보다 시문학이 더 철학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시문학은 일어날 법한 일들을 다루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지만,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기에 보편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투키디데스는 분명 단순한 역사가가 아니라 정치 철학자이다. 그는 개별 사건들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개별 사건들 배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내고 변화하는 사건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그의 서술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영원한 재산’일 수 있다면, 그것이 과거 사실의 기록을 넘어 역사의 논리에 대한 연구라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연구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가 남긴 ‘영원한 재산’이 정말 유용한지 판단하려면, 우리는 전쟁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 함정 프로젝트’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 앨리슨은 하버드대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에서 지난 500년 동안의 16개 역사적 사례들을 분석한 결과 그중 12차례의 전쟁이 투키디데스가 찾아낸 ‘위험한 역사적 패턴’을 반복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패턴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불렀다. “아테나이인들이 강대해지면서 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말로 투키디데스가 요약한 상황이 12차례 전쟁의 기본 패턴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러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유용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대한 통찰이 투키디데스의 전쟁사에 담긴 진실의 전부일까? 앨리슨 교수의 연구는 이 역사서의 유용성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지만 ‘함정’ 이야기는 그 안에 담긴 수많은 통찰과 경고의 일부일 뿐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그 ‘영원한 재산’의 목록을 살펴볼 예정이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