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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국 경제 식민지 될 수도”… 서방의 대러제재에 웃는 중국

입력 | 2023-06-04 15:05:00

중·러 교역 29.4%↑… 中 자동차, 러시아 시장 싹쓸이




“서방의 제재로 판로가 막힌 러시아 기업들이 중국 수출에 매달리고 있다.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과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중국의 경제 식민지(economic colony)가 될 위험이 있다.”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4월 11일 미국 라이스대 베이커공공정책연구소에서 연설한 내용의 일부다. 번스 국장의 지적처럼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로 갈수록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월 21일 정상회담을 갖고 합의 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크렘린궁 제공]




中 최대 원유 공급국 된 러시아
러시아 경제의 대중(對中) 의존도는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최근 중·러 무역은 폭발적 증가세다. 중국 해관총서(한국의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러 교역 규모는 1903억 달러(약 251조6500억 원)로 전년 대비 29.4% 증가했다. 특히 중국은 지난해 원유와 천연가스 등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이 급증하면서 382억 달러(약 50조5000억 원) 무역적자를 봤다. 1~4월 두 나라 간 교역 규모는 731억 달러(약 96조6000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3%나 늘었다. 중국의 대러 수출이 67.2% 늘어난 336억 달러(약 44조4000억 원), 러시아의 대중 수출은 24.8% 증가해 394억 달러(약 52조1000억 원)에 달했다. 이런 추세라면 양국 교역 규모가 올해 말 사상 최고치인 2000억 달러(264조5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설정한 목표보다 1년 앞선 수준이다.

러시아는 2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중국의 최대 원유 공급국이 됐다. 1~4월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전년 동기보다 26.5% 급증한 3240만t으로 역대 최대다. 같은 기간 사우디산 원유 수입량은 2.9% 늘어난 3128만t으로 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만 해도 사우디가 원유 8749만t을 중국에 수출해 1위였고 러시아(8620만t)는 2위였다.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이 크게 늘어난 것은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EU), 호주가 지난해 12월 러시아산 원유에 가격상한제를 시행했고, 2월 석유제품들도 가격상한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서방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줄일수록 중국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은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러시아의 대중 에너지 공급이 올해 40%가량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목할 점은 중국이 러시아산 원유 등 에너지를 수입하면서 위안화 결제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구축한 ‘국경 간 위안화 지급 시스템(CIPS)’ 결제액은 지난해 96조 7000억 위안(약 1경8000조 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21% 증가한 수치다. 위안화로 러시아산 원유를 매입한 금액이 반영된 결과다. 중국은 지난해 러시아로부터 603억 달러(약 80조 원) 상당의 원유를 매입하면서 이를 위안화로 결제했다. 2월 러시아 모스크바 외환거래소에서 위안화가 처음으로 월간 외환 거래량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2월 위안화 거래량은 1조4800억 루블(약 26조 원)로 전달보다 37% 늘어나 러시아의 전체 외환 거래에서 40%를 차지하게 됐다. 1년 전 0.32% 비중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증가다.

러시아는 대중 천연가스 수출을 늘리고자 적극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제재로 전체 천연가스 수출량의 80%를 차지하는 유럽 판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가스를 판매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뿐이다. 중국은 ‘시베리아의 힘1(PS1)’ 가스관을 통해 2019년부터 러시아산 가스를 본격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산 가스 수입액은 2018년 4억 달러(약 5291억6000만 원)에서 지난해 109억 달러(약 14조4000억 원)로 급증했다. 중국의 가스 수입에서 러시아 비중도 같은 기간 0.8%에서 12%로 상승했다. 러시아는 몽골을 거쳐 중국에 닿는 ‘시베리아의 힘2(PS2)’ 가스관 프로젝트를 통해 매년 500억㎥의 가스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中,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 확보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연결되는 시베리아의 힘1(PS1) 가스관 라인. [가즈프롬 제공]

러시아는 PS2 가스관을 만들어 중국에 가스를 수출할 경우 유럽의 수출 제재를 상쇄할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5월 23~24일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를 단장으로 부총리 3명과 장관 5명, 대기업 총수 등 기업인으로 구성된 500명 규모의 경제 대표단을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 파견해 리창 중국 총리 등과 에너지 협력을 논의했다. 미슈스틴 총리는 “중국과 에너지 협력은 러시아의 무조건적 우선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미슈스틴 총리는 시 주석까지 만났지만 PS2 가스관 프로젝트에 대한 중국 측 확답을 얻지는 못했다. 시 주석은 그동안 PS2 가스관 프로젝트에 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러시아가 중국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을 허용한 것도 PS2 가스관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국은 6월 1일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항구’로 추가해 각종 제품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이에 중국 동북 도시들은 육로로 1000㎞ 떨어진 랴오닝성 잉커우항이나 다롄항으로 화물을 옮겨 선박을 이용하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됐다. 인접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이용함으로써 운송 시간과 물류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는 3월 21일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의 모스크바 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결과다. 당시 두 정상은 ‘2030년 중·러 경제협력 중점 방향에 관한 공동성명’에서 “국경 지역 잠재력을 발굴해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간 교류 협력을 발전시킨다”고 발표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이 중국에 ‘통 큰’ 선물을 건넨 이유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만큼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는 서방의 강력한 제재로 대중 에너지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중국 입장에선 1860년 베이징조약 이후 163년 만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을 확보했기에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셈이다. 물류비를 대폭 절감한 것은 물론, 낙후됐지만 잠재력은 큰 지역으로 꼽히는 지린·랴오닝·헤이룽장 등 동북 3성 발전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연해주가 중국의 지원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중국 동북 지역 경제에 러시아 연해주가 종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은 중국이 PS2 가스관 프로젝트를 미루면서 향후 러시아와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범유럽 싱크탱크 유럽외교협의회의 알리차 바쿨스카 연구원은 “중국은 PS1 당시에도 협상을 질질 끌며 유리한 계약을 끌어낸 경험이 있다”면서 “중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자국의 협상력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중국의 모호한 입장 탓에 갈수록 애가 타고 있다. 러시아 정부 재정의 핵심인 에너지 수익은 4월 6475억 루블(약 11조40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64% 급감했다. 러시아 투자은행 BCS글로벌마켓은 중국이 PS2 가스관 프로젝트에 합의할 경우 자국 국영가스기업 가즈프롬은 연매출 120억 달러(약 15조8800억 원), 러시아 정부 재정수입은 46억 달러(약 6조9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판로가 막힌 러시아의 유일한 경제적 의존 대상국이 중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된 셈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3월 22일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해 중·러 관계를 정략결혼으로 평가하면서 “러시아가 ‘아랫사람(junior partner)’이 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대러 무역 흑자 기록한 中
중국은 최근 들어 대러 교역에서 흑자까지 달성하고 있다. 중국 해관총서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4월 대러 수출액은 96억 달러(약 12조7000억 원)를 기록했다. 지난해 4월 대비 254% 급증한 규모다. 이로써 2020년 11월 이후 2년 5개월 만에 러시아와의 무역도 흑자로 전환했다. 수출이 크게 늘어난 제품을 보면 기계,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반도체, 가전제품, 휴대전화 등이다. 중국은 1000여 개 외국 기업이 철수한 러시아 소비자 시장에서 공백을 메우며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중국 자동차업체들은 특히 서방과 한국 업체들을 대신해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러시아 자동차산업 컨설팅업체 아프토보스의 타티야나 그리고리예브나 대표는 “외국 자동차 기업 가운데 현재 러시아에 남아 있는 것은 지리, 하발 등 중국 자동차업체밖에 없다”며 “러시아 시장에서 비중이 아주 적었던 중국 자동차들이 연말까지 60% 시장점유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중국의 1분기 러시아 자동차시장 점유율은 42.5%에 달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러시아 경제는 중국에 좌지우지될 것이다. 중국은 전략적으로 러시아를 이용해 국익을 챙기면서 국력도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 서방이 버는 셈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