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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 스타’ 이대훈, 선수 은퇴 후 펼쳐진 인생 2막은 성공적 [김배중 기자의 볼보이]

입력 | 2023-06-05 16:25:00

‘선수위원’으로 행정가 꿈 첫발
‘지도자’로 힌국 선수단의 첫 金 합작




6월 5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막을 내린 2023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한국 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세계태권도연맹(WT) 선수위원에 도전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이대훈. 지도자로 남자 58㎏급에 출전한 배준서와 한국 선수단의 이번 대회 첫 금메달을 합작했고 WT 선수위원에도 당선됐다.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전 세계인의 스포츠로 성장하고 있는 ‘국기’ 태권도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이대훈(31). 아시아경기에서 태권도선수 최초의 3연패를 기록했고 올림픽 다음 레벨로 평가받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없는 게 아쉽다면 아쉽지만 올림픽에서 ‘아름다운 패자’를 이야기할 때 이대훈이 보여준 스포츠맨십은 지금도 회자된다.

2016년 리우 올림픽, 2021년 도쿄 올림픽 당시 이대훈은 경기에서 진 뒤 승자의 손을 번쩍 들어주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으로 박수를 받았다. 리우 올림픽 당시 이대훈은 “내가 이길 때 상대가 인정 못하고 표정이 안 좋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승자의 기쁨을 극대화하는 게 선수로서의 도리이자 예의”라고 말하기도 했다.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 당시 남자 68㎏급에 출전했던 이대훈이 동메달 결정전에서 중국의 자오솨이에게 패한 뒤 엄지를 치켜세우며 상대를 축하해주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밝힌 이대훈은 “다른 선수위원들처럼 올림픽 금메달 경험은 없지만 올림픽에서 보여온 ‘스포츠맨십’이 금메달 못지 않은 강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DB


기량, 인성과 더불어 외모까지 완벽한 이대훈 앞에 ‘태권도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리고 이대훈이 선수에서 은퇴할 때까지 경기준비만큼 바쁜 일 중 하나는 국제대회에 참가했을 때 다른 선수들과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선수들이 이대훈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고 함께 찍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2021년 7월 열린 도쿄 올림픽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8각 링’(태권도 경기장)을 떠나 있던 이대훈은 약 2년 만인 5월 26일부터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치러진 세계태권도연맹(WT) 50주년 행사, 2023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올 3월 대전광역시청 태권도 팀 코치로 선임된 이대훈은 국가대표팀 코치로 이곳에 왔다. 그리고 다른 꿈도 갖고 있다고 했다.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꿈이다.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던 이대훈은 그 첫 걸음으로 WT 선수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행정가로도 시험 무대에 올랐다. 바쿠에서 만난 이대훈은 “태권도를 떠나 있던 건 아니다.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9일 학위논문 심사도 앞두고 있다. 오랜만에 현장에 왔는데 반가운 얼굴들도 많고 좋은 말도 많이 해줬다. 역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며 웃었다.

5월 27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헤이다르 알리예브 센터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연맹(WT)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2021년 열린 도쿄 패럴림픽 여자 최우수선수에 뽑힌 덴마크의 리사 기싱에게 축하인사를 건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바쿠=김배중기자 wanted@donga.com


이대훈이 현역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단 선수위원이 되려면 투표권을 가진 대회 참가 선수들의 마음을 사야했다. WT 50주년 관련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던 곳에서 이대훈은 먼저 각국 협회 임원, 지도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2019년까지 대표팀에서 이대훈을 지도했고 호주 태권도 팀 지도자로 바쿠를 찾은 이석훈 감독(44)이 유창한 영어로 이대훈을 지원사격하기도 했다.

월드스타가 먼저 다가와 인사하자 반가운 마음을 금치 못한 각국 관계자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고 항상 ‘사진촬영’으로 마무리했다. 이대훈은 “현역 때만 해도 먼저 다가가는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와서 선수 때 못해 봤던 일을 하고 있다. 지도자,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니 비록 내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정말 반갑게 맞아주고 좋은 말을 많이 해줬다. 진즉에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있다”며 웃었다.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난 뒤, 이대훈은 적어도 자신이 목표로 삼은 것들을 모두 달성했다. 먼저 지도자로 5월 31일 남자 58㎏급에 출전한 배준서(23·강화군청)의 ‘세컨드석(지도자 자리)’에 앉은 이대훈은 배준서와 한국 선수단의 첫 금메달을 합작했다. 대회 첫날인 5월 30일 남자 68㎏급에 출전한 ‘간판’ 진호준(21·수원시청)이 은메달에 그쳤지만 이튿날 배준서가 금 물꼬를 트자마자 6월 1일 강상현(20·한국체대)이 남자 87㎏급에서, 3일 박태준(19·경희대)이 남자 54㎏급에서 깜짝 금메달을 획득하며 선수단의 사기를 올렸다. 태권도 남자팀은 2017년 무주 대회 이후 4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6월 1일 남자 87㎏급에 출전한 강상현(위)과 다음 라운드 시합을 기다리며 회복을 하는 중에 함께 누워서 태권도 영상을 보고 있는 이대훈.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그리고 세계선수권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6월 3일, 이대훈은 자신이 바랐던 WT 선수위원에 당선됐다. 남자 후보 6명이 출마해 2명을 뽑아 경쟁이 치열했지만 WT 관계자에 따르면 이대훈의 득표율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압도적이었다. 지도자, 선수위원 도전 등의 활동이 모두 처음이었지만 이대훈은 능숙하게 잘 했다. 시합이 있을 때마다 대표팀 동생들과 함께 대기실에 누워 태권도 동영상을 보며 다독이고 격려했다.

경기가 끝난 다른 나라 선수의 호구에 사인을 해주고 있는 이대훈(오른쪽). 바쿠=김배중기자 wanted@donga.com

선수들이 계체를 하고 투표하는 시간에는 그 길목에 서서 조용히 목례를 하며 선거운동을 했다. 이대훈은 “계체를 하고 경기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이 선수들이 가장 민감해할 때다. 선수시절에 선거운동을 요란하게 하는 걸 싫어한다는 얘기를 동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나만 해도 (선수 시절에) 유인물을 나눠주는 등 요란했던 후보에게 반감을 갖고 안 찍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대훈이 세계태권도연맹 선수위원 선거운동을 하며 선수들 및 현장을 찾은 관중들에게 나눠준 자체 제작 이대훈 배지. 이대훈 제공


유권자들과 ‘아이 콘택트’를 하며 인사하다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면 사진을 찍고 ‘선물’을 쥐어줬다. 한국에서 직접 제작해 가져온 ‘이대훈 배지’다. 이대훈은 “올림픽 때 보면 선수들이 핀을 수집하고 서로 마음에 드는 건 맞교환을 하기도 했다. 그런 소소한 재미를 느꼈던 걸 생각하고 배지를 만들어 와서 나눠줬다”고 말했다. 선수시절 선수들의 선망 대상이었던 이대훈이 ‘전지적 선수시점’으로 선수들에게 젖어드는데 투표에서 압도적 득표율이 안 나올 이유가 없었다.

당선이 확정되고 이대훈은 “선수들을 위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는 “예를 들면 계체를 할 때 그간 힘들게 감량을 하느라 지친 선수들이 맨 바닥에 주저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이런 작은 불편함이라도 없애기 위해 의자를 많이 갖다 놔달라고 건의하는 등 선수들이 대회장에서 경기를 하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게끔 힘쓰고 싶다”고 했다.

이대훈이 6월 3일 세계태권도연맹(WT) 선수위원에 당선된 뒤 이날 세계태권도대회 현장을 방문했던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장(IOC)이 직접 달아준 오륜모양의 핀을 가리키며 웃고 있다. WT 선수위원이 된 이대훈의 다음 목표는 IOC 선수위원이다. 세계태권도연맹 제공


WT 창립 50주년을 맞아 치러진 이번 대회에서 이대훈의 대회 ‘전과 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영어 등 각종 외국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 항상 뭔가를 배우면 메모장에 메모를 하며 익혔다. 현역 시절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다던 세계 각국 태권도계 인사들의 얼굴을 익히고 나면 다음에는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앞으로 태권도계 뿐만 아니라 ‘세계 스포츠계’로 보폭이 넓어진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일상처럼 해야 할 일들이다.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에서 인생 2막을 점화하기 시작한 이대훈의 첫 발걸음은 성공적이었다.

바쿠=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