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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문화돼야 할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오늘과 내일/장택동]

입력 | 2023-06-05 21:30:00

‘국회 기능 침해 방지’라는 도입 취지 퇴색
법률 개정·국민의 감시로 특권 남용 막아야



장택동 논설위원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법은 그 위에 있다’는 법언이 있다. 그런데 불체포특권이 있으면 ‘당신이 의원이라면 법이 건드리지 못한다’로 바뀌게 된다.” 국제적 헌법 자문기구인 베니스위원회가 2014년 채택한 보고서 내용이다. 불체포특권은 ‘법 앞의 평등’ 원칙을 훼손할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의원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국회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등 부작용이 많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현실에 꼭 들어맞는 지적이다.

의원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많지만 이를 놓고 한국처럼 논란이 거세게 벌어지는 나라는 드물다.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넘어올 때마다 여야 또는 계파 사이에서 정쟁이 벌어지고, 체포를 막기 위해 ‘방탄 국회’가 열린 것도 여러 차례다. 12일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의 윤관석, 이성만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을 전후해 정치권에는 또 한바탕 격랑이 일 것이다.

나라마다 불체포특권을 운용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미국은 헌법에서 ‘반역죄, 중죄, 치안위반죄’를 불체포특권의 예외로 뒀지만, 이 세 가지 혐의가 모든 범죄를 포괄한다는 대법원의 해석에 따라 불체포특권이 실질적으론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 헌법은 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인정하되 법률이 정하는 경우 제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뒀다.

반면 한국에서는 회기 중에 의원을 구속하려면 범죄의 종류나 경중과 관련 없이 먼저 체포동의안이 가결돼야 한다. 한국에서 체포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지금까지 국회에 요청된 체포동의안은 총 68건인데 이 중 17건만 통과됐다. 체포동의안 가결률이 일본은 90%, 독일은 92%에 이르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 검찰이 무리하게 구속영장을 청구했기 때문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1989년 이후 부패 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국회의원 25명 가운데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사례는 3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22명은 범죄 혐의가 뚜렷해서 영장을 청구했는데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의원들이 법리, 증거와 무관하게 정치적·감정적으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의원에게 불체포특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정부가 국회를 탄압해 국회의 기능이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민주화 이전에는 의원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불체포특권은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고, 사법 절차에 정치적 판단을 개입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그래서 불체포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올해 2월 갤럽의 조사에서 불체포특권 폐지에 찬성(57%)한 응답자가 반대(27%)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불체포특권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폐지는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재정권 출현 등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남겨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불체포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면 정상적으로 헌법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되는 수준으로 사용이 제한돼야 한다. 이는 국회법 개정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무기명으로 이뤄지는 체포동의안 투표를 기명으로 바꿔 각 의원이 투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하고, 국회 보고 이후 일정 기간 내에 표결이 이뤄지지 않으면 가결로 간주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법률 개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회가 자신의 특권을 버리거나 줄일지는 의문이다. 여론이 강력하게 압박해야 국회가 움직일 것이다. 이해관계나 동료 의식을 핑계로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을 의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정치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유권자가 이를 감시하고 심판해야 불체포특권 남용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