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자 12명 함께 낸 신간서… 윤경진 교수 ‘7세기 성립설’ 반박 “통일전쟁때 ‘일통삼한’ 용어 없고, 7세기 성립설 근거로 제시됐던 ‘운천동 사적비’ 9, 10세기에 세워… 신라말 통일관념 생겨 고려때 완성”
7세기 중엽 나당 연합군이 백제, 고구려와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 명장 김유신의 표준영정(왼쪽 사진). 김유신은 835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면서 ‘삼국통일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때는 822년 신라에서 ‘김헌창의 난’이 벌어져 내부 분열이 일어난 뒤였다. 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고구려의 영역을 모두 통합하지 못했고,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부정적 평가는 있지만 통일 자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한 논쟁이 오래 이어져 왔다. 1980년대 들어 신라가 당나라군과 연합한 건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을 뿐 애초에 고구려는 신라의 정벌 및 통합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대 삼국통일을 뜻하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은 존재했을까. 기존에는 이 의식이 7세기 전후 신라에서 성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윤 교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성립돼 고려의 태조 왕건이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合三韓(합삼한·삼한을 합쳤다)’이 나오는 ‘청주 운천동 신라 사적비’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는 9, 10세기경 만들어졌다고 본다. 사진 출처 국립청주박물관
보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는 871년 신라 경문왕 때 이 목탑을 다시 만들면서 제작한 금동 사리함이다. 표면에 ‘果合三韓(과합삼한·과연 삼한을 합쳤다)’는 문구가 나온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기존 설에서는 당 태종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에 주겠다고 한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를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윤 교수는 평양 이남을 ‘고구려 영토’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오히려 통상적인 해석에 따라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이고 백제 영토를 주겠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는 견해다. 적어도 전쟁 이전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까지 모두 획득해 삼국을 통일하고자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게 ‘신라는 정말…’을 쓴 학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 시기는 전쟁 이후인 7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이번 책을 엮은 정요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머릿말에서 “‘삼국통일’과 일통삼한 의식에 관한 주제는 한국 고대사 분야의 핵심적인 논쟁 주제”라며 “실증 논거를 바탕으로 한 논쟁이 더욱 발전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