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이르면 다음 주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정찰 풍선 논란 이후 냉각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예고한 가운데 양국 관계가 실질적인 해빙 무드에 접어들 수 있을지 주목된다.
8일(현지시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블링컨 장관이 현재 진행 중인 중동 순방을 마치고 중국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초 블링컨 장관은 지난 2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중국의 정찰 풍선으로 양국 간 긴장감이 커지며 일정이 무기한 연기됐다. 이번 방중이 성사될 경우 2018년 10월 트럼프 행정부 시절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이후 5년 만에 이뤄지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블링컨 장관의 이번 방중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 말한 미·중 관계의 ‘해빙기’ 도래를 위한 주요 단계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미·중 양국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개방형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소통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중국 정찰 기구가 미국 영토 상공을 비행하는 것이 목격되며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블링컨 장관이 방중을 무기한 연기한 데 이어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중남미 순방 길에 경유 형식으로 미국을 방문하며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대사가 지난달 8일 친강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하나의 중국’ 원칙 준수 등을 강조하면서 중국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줬고,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지난달 1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틀간 회담했다.
중국 역시 존 케리 미국 백악관 기후특사를 초청하며 대화에 호응하는 모양새다. 또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와 세라 베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이 지난 5일 중국을 찾아 양타오 중국 외교부 북미대양주사 사장과 마자오쉬 외교부 부부장과 대화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미·중 상무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미국 워싱턴에서 만나 서로 간 이어진 제재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한편 대화 창구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두 정상은 양국의 전반적인 무역 및 투자 환경과 잠재적인 협력 분야를 포함해 미중 무역 관계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 분야서는 대화 없어…리샹푸 제재 해제 두고 입장차만 확인
중국은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를 계기로 미중 국방장관 회담을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한 데다 대만해협에서 양국 함정이 충돌할 뻔 하는 등 여전히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상태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는 미·중 국방수장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중국이 요구해 온 리샹푸 국방부장(장관)에 대한 제재 해제에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리 장관은 지난 2018년 중국이 러시아 전투기를 구매한 것과 관련해 중국 군 당국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돼 미 정부 제재 대상에 올랐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이 일부 문제에 대해 협상 테이블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면서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이 예견한 미·중 관계의 ‘해동’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국방 수장을 제재 대상에 올린 미국이 그 제재 대상과 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만큼 대화에 나서기 힘들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익명의 중국 군사 분석가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미국의 리 장관에 대한 제재로 야기된 명백한 문제 외에도 고위급 대화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며 “(리 장관이 제재 대상에 오른 상태에서) 리 장관과 오스틴 장관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 미국의 엄중한 도발 뒤에 이뤄지는 소통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지적했다.
◇中, 美에 진정성 보일 것 요구…근본적 시각 차이에 갈등 봉합 어려울 듯
중국 측에서 미국에 관계 개선의 진정성을 보이라고 지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만큼 이번 만남만으로는 양국 관계가 완전한 화해 분위기로 돌아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후보 북경대 해양전략연구센터 소장은 SCMP에 “양측의 관점과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메커니즘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면서 “제재 해제는 중국이 소통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가 돼야 하며, 미국이 먼저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 시절 중국 담당 고문을 지낸 폴 해늘 카네기-칭화대 글로벌 정책센터소장도 “중국이 미국의 행동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 지렛대로서 군사 대 군사 대화를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위 군사 분야 회담은 당장 복구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대(對)중 제재를 완화하는 등 실질적인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션 덩리 중국 푸단대학교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우리(중국)는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회의와 미국이 제재를 해제하고 상호 양보를 통해 타협점을 찾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해늘 소장 역시 “중국이 관계의 안정을 찾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전략적 압력을 완화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그들은 미국이 제재와 수출 통제를 중단하기를 요구한다”고 분석했다.
양국이 현재 긴장 상황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갈등이 봉합되기 힘들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는 “미국이 강조하는 언어가 중국에는 중요하지 않다”며 “디리스킹(de-risking·위험제거)이든 디커플링(탈동조화)이든, 중국을 적이 아닌 경쟁자라고 부르든, 이러한 언어 사용의 변화가 미국에 대한 중국의 관점을 바꿀 여지는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구체화한 대중 경제정책인 디커플링에서 벗어나 디리스킹을 강조하고 있다. 디리스킹은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인 디커플링과는 달리 국익을 따져 부분적이고 선택적인 조처를 취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
다만 중국 측에서는 수사적 표현만 바뀌었을 뿐 중국 억제라는 전략 목표는 여전하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FP는 “미국의 접근 방식에도 모순이 있다. 지금 많은 미국 정부 직원들은 이 중국을 견제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조치를 취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따라서 중국이 미국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인식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또 매체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권력 분립이나 다당제 시스템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미국의 정책 결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 간 간극은 미국의 지원에 대한 불신만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