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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막이판’ 무료로 설치해 주는데…미설치 반지하 ‘수두룩’ 왜?

입력 | 2023-06-09 15:14:00

8일 방문한 관악구 신림동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물막이판이 설치된 모습. 2023.06.08 ⓒ 뉴스1


‘올여름 폭우가 잦다는데 신림동은 괜찮을까?’

8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 반지하 밀집지역을 기자가 찾은 이유다. 지난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에 반지하주택이 물에 잠기면서 안타까운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관악구에서만 4800여 세대가 침수됐다.

10개월이 지난 지금, 신림동 일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외부에서 빗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물막이판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침수로 인해 현관문이 열리지 않을 때 물막이판을 위로 올린 후 빠져나올 수도 있다.

◇ ‘물막이판’ 무료로 설치해 주는데…미설치 반지하 ‘수두룩’ 왜?

13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PC방 앞에 설치된 ‘일체형 빗물받이’ 덮개가 열려있다. 관악구청은 지난해 8월 폭우 피해 직후 일체형 빗물받이를 모두 제거했다. 22.08.13 ⓒ 뉴스1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학과 교수는 “태풍이 경로를 바꿔 우리나라로 올 경우 국지성 호우가 6월에도 올 수 있기 때문에 물막이판 설치를 서둘러야 한다”며 “상습 침수 구역은 창문의 대부분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그 외에는 원래대로 3분의 1 정도 막는 높이로 설치하는 등 과하다 싶을 정도의 대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시간 동안 둘러본 지난해 침수 피해 지역에선 물막이판이 드문드문 보였다. 설치하지 않은 다세대주택도 많았다.

이에 대해 관악구청 관계자는 “물막이판을 설치하면 침수 위험이 있거나 침수 피해를 본 집이라고 홍보하는 것으로 생각해서인지 집주인들이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임차인이 설치를 원해도 임대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유재산이라서 설치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집값 때문에 세입자의 위험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이날 둘러본 빗물받이도 지난해에 비해 큰 차이가 있었다. 2021년 관악구는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 등을 막고 빗물받이 아래에 담배꽁초 등 쓰레기가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덮개가 칸칸이 하얀색 플라스틱 재질로 덮인 ‘일체형 빗물받이’를 도입했었다.

인근 주민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의 빗물받이가 담배꽁초 등 각종 이물질로 막히거나 고장이 나는 등 오히려 물의 흐름을 방해해 침수피해를 키웠다고 설명했다.

결국 관악구는 지난해 8월 침수 피해 직후 일체형 빗물받이를 모두 제거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침수와 관계는 없지만 주민이 불안을 호소하셔서 제거했다”고 말했다.

신림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50대 구모씨는 “지난해 침수 때 밖으로 나와 배수구 덮개를 끄집어내니 배수가 됐었다”며 “예산을 들여 설치하고 예산을 들여 제거하는 모습이 답답하다”고 성토했다.

기상청은 올해 여름에도 엘니뇨의 영향으로 7~8월에 평년보다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다음 달에 ‘5일 빼고 비가 내린다’는 ‘장마 괴담’까지 확산되고 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물막이판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민들에게 안내하고 침수 우려 지역의 빗물받이는 월 2회씩 청소를 하며 집중호우에 피해가 없도록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주지원에도 반지하 세입자 그대로…“싸니까 다른 세입자 금방”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북상 중인 5일 기록적인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다세대 주택 반지하가 창문을 떼어놓은 채 방치되고 있다. 2022.9.5/뉴스1

정부의 이주지원에도 불구하고 신림동 반지하에 사는 이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만난 70대 이모씨는 “다음 달에 폭우가 온다는데 누가 반지하에서 살고 싶겠어요. 월세가 싸니까 계속 사는 거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난해 집이 침수돼 주민센터에 마련된 임시대피소에서 머무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며 “이번에도 또 물이 넘칠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수마를 겪은 많은 반지하층 주민이 지상층으로 이사하거나 동네를 떠났다. 그러나 공실인 지하층은 곧 새로운 사회적 약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사할 돈마저 부담스러웠던 이들은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들에게 반지하는 생존의 문제임과 동시에 생계의 문제인 것이다.

인근 부동산의 한 공인중개사는 “지난해 폭우 이후 많은 반지하 거주민이 이사 갔는데 가격이 싸다 보니 연세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우신 분들이 이사를 오셨다”며 “현재 지하층과 반지하 80~90%가 다시 찼다”고 설명했다.

반지하에 거주하는 김모씨(69)는 “지난해 폭우 때 문틈으로 물이 계속 들어오고 하수구로 물이 안 빠져서 새벽에 일어나 바가지로 물을 계속 퍼냈었다”면서도 “정부에서 지상으로 이사하면 2년 동안 월 20만원을 지원해 준다고 하지만 그 돈으론 지상층 입주가 어려워 계속 살고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폭우를 계기로 ‘지하·반지하’ 주택 폐지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반지하 주택을 포함한 침수 우려 주택 매입은 지난달 11일 기준 72곳에 그쳤다. 지난해 1000가구를 목표로 해 72곳을 매입했지만 올해 목표한 3450곳 중 매입이 완료된 곳은 아직 없어 달성률은 1.6%에 머물러 있다.

‘반지하 이주책’ 성적도 초라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행한 최대 2년간 매달 20만원씩 지원하는 반지하 특정 바우처의 경우 지금까지 970여가구가 지원받는 데 그쳤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