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태어나 9세 때 부모와 미국 이민… “회사란 남들 못하는 일 하는 곳”
글로벌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12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의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뉴시스]
엔비디아 관계자가 6월 7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말한 황 CEO(이하 젠슨 황)에 대한 평가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설립 30년 만에 ‘1조 달러(약 1300조 원) 클럽’에 진입하면서 창업자인 젠슨 황에 대한 세계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엔비디아 구성원들이 꼽은 회사의 특성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이고, 둘째는 ‘원 팀 정신’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위기의 순간 엔비디아를 구한 주요 동력이다.
‘호랑이 선생님’이자 세심한 경영자
엔비디아는 5월 30일 가속화된 생성형 인공지능을 위한 그레이스 호퍼 슈퍼칩을 본격 생산한다고 밝혔다. [엔비디아 제공]
“취업이나 하러 가지….”
젠슨 황이 1993년 친구들과 반도체 칩을 만드는 회사를 창업하겠다고 알리자 그의 어머니가 내놓은 답이다. 당시 젠슨 황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현재 플랫폼 기업들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일 것이다. 젠슨 황이 일반 반도체 회사 직원으로 일했다면 인공지능(AI) 시대 필수품으로 꼽히는 그래픽처리장치(GPU)의 개발이 훨씬 늦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1963년 화학 응용 공학자였던 아버지와 영어를 가르쳤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자란 그는 9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 오리건주립대를 졸업한 후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의 수장인 모리스 창 회장 역시 스탠퍼드대 출신이다. 젠슨 황은 반도체 기업 LSI 로지스틱스와 AMD의 반도체 설계 업무를 맡아 일하다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엔비디아는 미국 레스토랑 체인 ‘데니스(Denny’s)’에서 시작됐다. 젠슨 황은 1993년 그래픽 칩셋 설계 엔지니어 커티스 프리엠, 전자기술 전문가 크리스 말라초스키와 함께 엔비디아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30세 때 일이다. 이들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있는 데니스에 모여 커피를 홀짝이며 창업의 꿈을 키웠다. 엔비디아 공동창업자인 말라초스키는 언론 인터뷰에서 “4시간 동안 커피 10잔을 마실 계획이었다”며 “(식당 입장에서) 우리는 좋은 고객이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커피만 연거푸 마신 탓에 이들은 식당 뒤편 방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스타트업을 차렸지만 회사명은 곧바로 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파일을 제작할 때면 ‘다음 버전(next version)’의 앞 글자를 딴 ‘NV’를 파일명에 붙여온 만큼, 스타트업도 이에 착안에 ‘Nvision’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회사가 이미 여러 곳 있었다는 점이다.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이들은 라틴어 사전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NV’와 발음이 유사한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부러움)를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회사 이름을 정했다. 엔비디아(NVIDIA)가 탄생한 순간이다.
엔비디아는 지능형 상시 커넥티드 차량 설계 등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엔비디아 제공]
“굴욕적인 일 많았지만…”
엔비디아는 이름처럼 처음부터 업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기업은 아니었다. 젠슨 황의 아이디어가 시장을 너무 앞서간 탓인지 사업은 자주 난항을 겪었다. 1995년 PC용 멀티미디어 그래픽카드 ‘NV1’을 출시했지만 판매는 원활하지 않았다. 성능은 우수했으나 가격이 비쌌고, 독자 기술을 고수한 탓에 호환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젠슨 황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평소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그는 향후 3차원(3D) 그래픽 가속 기술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997년 ‘NV3’를 출시하며 시장에서 호평받았고, 이후 본격적으로 업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1999년 최초 지포스 제품군 ‘NV10(지포스 256)’을 출시했다. 같은 해 나스닥에 상장하면서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엔비디아는 설립 초기 일본 게임업체 세가(SEGA)와 계약을 체결했다. 세가의 게임 콘솔 제작에 참여하는 대신 수백만 달러 상당의 사업 자금을 유치했다. 문제는 개발 시작 후 1년이 지나 발생했다. 엔비디아가 설계한 아키텍처(기능 면에서 본 컴퓨터 구성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엔비디아의 아키텍처는 경쟁사인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 격차가 클뿐더러, 호환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가로부터 잔금을 받지 못하면 엔비디아는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연봉 1달러 받은 CEO
위기의 순간 젠슨 황은 고심 끝에 세가 CEO에게 상황을 솔직히 말했다. 그는 세가 측에 다른 파트너를 찾을 것을 권하면서도 회사의 재정 상황을 설명했다. 젠슨 황은 당시를 두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 돈(잔금)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는데 놀랍게도 세가 CEO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덕분에 엔비디아는 6개월 운영 자금을 벌었고, ‘RIVA 128’을 출시해 회사를 안정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겸손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솔직한 태도로 주변에 도움을 구할 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그의 사업 철학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위기는 또 찾아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다. 당시 엔비디아 역시 여느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파산 위험을 겪었다. 엔비디아는 2007년 많은 비용을 들여 GPU 기반 소프트웨어 쿠다(CUDA)를 출시했는데 시장 반응이 시원찮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위기까지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 국면으로 치달았다. 소비자들이 GPU 구매를 줄이자 재정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시장 역시 엔비디아에 대한 기대를 거둬 주가는 나날이 떨어졌다. 위기의 순간 빛을 발한 것은 젠슨 황의 ‘자기희생 리더십’이었다. 그는 2008년 말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삭감하며 위기에 대처했다.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절약한 비용을 인재 영입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포브스’에 따르면 젠슨 황의 기본급여는 2011년이 돼서야 60만 달러(약 7억8000만 원)로 복원됐다. 이듬해 AI 연구자 사이에서 CUDA가 알려졌고, 엔비디아는 당시 경험에 기반에 딥러닝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긴 덕분에 엔비디아는 AI 산업의 강자로 설 수 있었다.
젠슨 황 CEO가 5월 27일(현지 시간) 대만 수도 타이베이 국립대만대 졸업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엔비디아 제공]
“먹잇감 되지 않으려면 달려야”
젠슨 황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0 billion markets(0억 달러 시장)’다. 그는 과거 ‘신경망 프로세스를 갖춘 로봇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만 해도 그 시장은 0억 달러 시장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막대한 잠재력이 있지만 개발되지 않아 당장 수요가 없는 시장을 이같이 부른 것으로 풀이된다. 초창기 PC 게임 시장은 물론, AI 컴퓨팅까지 엔비디아가 몸담았던 시장은 대부분 0억 달러 시장이었다. 0억 달러 시장은 이내 수십억 달러 시장으로 개척됐고 엔비디아의 성장을 이끌었다.젠슨 황은 여느 CEO와 달리 특이한 행보를 많이 밟았다. 그는 엔비디아 주가가 100달러를 돌파하자 이를 기념하고자 왼쪽 어깨에 엔비디아 로고를 타투로 새기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항상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해 ‘젊고 신선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젠슨 황의 이 같은 모습을 두고 검은 터틀넥에 청바지 패션으로 단상에 올랐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는 탁구 실력 또한 수준급이다. 14세 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탁구 유먕주로 소개됐으며, 이듬해 주니어 대회에서 3위로 입상하기도 했다. 무엇 하나 통상의 CEO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좀처럼 예상되지 않는 행보를 밟아온 그이지만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이 있다. 바로 0억 달러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자세다. 젠슨 황은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달려 나갈 것을 주문한다.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변화가 펼쳐지는 시기에 끊임없이 달려 나가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국립대만대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먹잇감을 잡기 위해 뛰든,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뛰든 여러분은 달려야 한다”며 “둘을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어쨌든 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93호에 실렸습니다〉
최진렬 기자 displ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