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선수에서 은퇴한 후 방송인으로 제2의 전성기를 살아가고 있는 유희관.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얼굴만 보면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너끈히 던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서 던져도 나온 스피드는 130km 안팎이 고작. 직구만 느린 게 아니었다. 사회인 야구에서나 나올 법한 시속 70km대의 커브(라고 쓰고 ‘아리랑볼’이라고 읽는다)도 종종 던졌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에서 뛰었던 유희관(37)은 KBO리그에서 가장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10년 전인 2013년 유희관은 서울 아리랑 페스트벌 행사의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유명 가수인 이승철과 존박 등도 함께 홍보대사를 맡았다. 야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홍보대사가 된 그는 “구성진 목소리로 아리랑 한 소절을 불렀다”고 했다. 2017년에는 당시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던 경기 남양주시의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공은 느려도 야구는 잘했다. 2009년 프로에 데뷔해 2021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두산 한 팀에서만 뛰며 101승 69패 평균자책점 4.58을 기록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는 8년 연속 10승을 거뒀다. 또한 두산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통산 100승을 달성한 왼손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도 3차례(2015년, 2016년, 2019년)나 차지했다. 현역 시절 그는 ‘느림의 미학’이라는 멋진 별명으로 불렸다.
방송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유희관이 엄지를 번쩍 들어 보이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남부럽지 않은 야구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은퇴 후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KBSN 야구 해설위원을 맡고 있으면서 각종 예능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유튜버 크리에이터로서도 순항하고 있다. 2022년 7월 개설한 유튜브 채널 ‘유희관희유’는 구독자 수가 12만 6000여 명에 이른다. 채 1년도 되지 않아 ‘실버 버튼(구독자 10만 명 이상)’을 받은 유희관은 “야구 선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려 만들었는데 이렇게 많은분들이 좋아해 주실 줄은 몰랐다. 이와 이렇게 된 김에 원대하게 ‘골드 버튼(구독자 100만 명 이상)’까지 달려 보겠다”고 말했다.
유희관이 만드는 컨텐츠는 야구와 관련된 게 많다. 10개 구단 홈구장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장면을 찍는다. 직접 생맥주 통을 등에 메고 맥주보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응원단상에 올라 치어리더들과 함께 춤은 춘다. 선수 때 입었던 두산 유니폼 대신 서울 라이벌 LG 트윈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응원을 하기도 한다. 각 구장 주변의 맛집들을 소개하는 것도 주요 컨텐츠 중 하나다. 유희관은 “내 인생은 야구와는 떨어질 수 없다. 조금이나마 팬들에게 야구를 알리고 싶다. 각팀마다 독특한 응원 문화를 알아보고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다. 제 영상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신다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방송인 또는 유튜버로서의 성공은 이미 예견된 바다. 유희관은 선수 시절부터 누구보다 입담이 좋은 선수였다. 마운드에서는 에이스가 아니었지만 ‘미디어데이 1선발’로 불렸다. 그는 포스트시즌이나 정규시즌에 앞서 열리는 미디어데이의 단골손님이었다. 은퇴 후에는 스포츠채널 여러 곳에서 야구 해설위원 제의를 받았다.
두산 치어리더들과 함께 공연 중인 유희관. 육중한 몸이지만 댄스에 일가견이 있다. 동아일보 DB
유희관이 야구 선수로, 이후엔 방송인으로 성공 가도를 걷는 것은 스스로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고교 때까지 그는 키도 작은 선수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감독이 다른 선수들은 운동을 시키면서 그에게 “넌 키 크게 철봉에 매달려 있으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부모님도 그에게 운동을 그만 시키려 했다. 하지만 당시 감독은 “키가 크고 힘이 붙으면 야구를 잘할 수 있다. 구속은 느려도 투구 폼은 너무 예쁘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유희관은 “돌이켜 보면 굉장히 뿌듯하다. 어릴 때 야구를 못하고, 공이 느려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아닌가. 지금 아마 선수들도 누구나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보여준 것 같다”고 말했다.
유희관이 한 자선야구대회에서 올라프 복장을 한 채 타격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방송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장’이 아닌 ‘오락부장’에 가까웠다. 말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조용한 분위기보다는 활발한 분위기를 선호했다.
유희관은 “사실 처음 은퇴를 하고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나를 찾아주는 곳이 있을까’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장훈, 안정환, 김병현 같은 운동 선수 출신 선배님들이 좋은 선례를 만들어 주신 덕을 많이 봤다”며 “때마침 ‘최강야구’라는 야구 예능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안착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시기를 잘 타고 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 일이 많아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야구가 잘 될 때 행복했던 것처럼 지금도 내 적성에 잘 맞는 일을 하니 행복하다. 운동선수 출신으로서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려는 자세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골프의 매력에 대해 그는 “투수 때는 던지기만 했다. 그런데 골프를 공을 때릴 수 있어서 좋았다”며 “개인적으로는 농구와 볼링, 탁구 등 공으로 하는 운동엔 모두 자신이 있다. 그런데 골프는 하면 할수록 어렵더라.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구력이 10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90개 안팎을 친다. 생애 베스트 스코어는 83타다. 야구 선수 출신치고는 잘 치는 편이 아니다.
2022~2023 여자프로농구‘ KB스타즈와 하나원큐 경기에서 프로야구 유희관 해설위원이 치어리더와 깜짝 합동 공연을 하고 있다. 청주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그리고 골퍼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비거리에 대해 그는 “제게 골프와 야구는 똑같다. 야구에서 강속구 대신 느린 공을 던졌던 것처럼 골프도 거리가 잘 나지 않는다. 제구를 잡듯이 ‘따박따박’ 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적지 않은 야구 선수 출신들이 드라이버로 280~300m를 보내지만 그의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는 220m 정도다. 그는 “티샷을 4번 아이언으로 할 때도 많다. 많은 분들이 롱 아이언을 어려워하는 데 난 이상하게 롱 아이언이 편하다. 4번 아이언으로 200m 보낸다. 18홀동안 드라이버 티샷을 한 번도 안해서 욕을 먹는 적도 있다”고 말했다.
유희관은 “누구나 멀리 치고 싶어 하지만 장타자들은 그만큼 아웃 오브 바운즈(OB) 확률도 높다. 거리에 신경쓰기 보다는 정확하게 치는 게 훨씬 나을 수 있다. 야구를 할 때부터 내 좌우명이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였다. 골프를 칠 때도 나에게 딱 맞는 말인 것 같다”며 웃었다.
이헌재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