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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다 빼간다” 공허한 비판…‘기술 인재’ 떠나는 이유 살펴야

입력 | 2023-06-13 15:21:00

박진성 수원지방검찰청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장이 12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 브리핑실에서 ‘국가 핵심자료인 반도체 공장 설계자료를 중국으로 빼돌려 무단 사용한 국내 최대기업 전 임원 등 7명 기소’ 관련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3.6.12/뉴스1


삼성전자에서 메모리 반도체 설계를 담당했던 A상무는 2018년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인 허페이창신(현재 창신메모리)으로 이직했다. 40대 초반에 임원에 올랐던 핵심 인력이었지만 삼성SDI 마케팅 담당으로 발령나면서 돌연 사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신메모리 설립 초기였던 2016년엔 SK하이닉스 D램 제조그룹장을 지낸 B상무도 자리를 옮겼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를 이끌었던 창신메모리가 당시 빼간 우리나라 반도체 인재만 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창신메모리는 설립 2년 만에 D램 시제품을 생산한 뒤 현재 중국 최대의 D램 개발 업체가 됐다.

반도체 개발을 막 시작했던 중국 기업들로선 단숨에 기술격차를 좁히기 위해 앞선 기술과 공정을 경험한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의 인재들이 필요했다. 반도체 핵심 인력 50명만 있다면 D램 제조 공정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연봉의 2~10배를 제시하며 노골적인 ‘인재 사냥’을 감행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핵심 인력을 빼가기 위한 중국 업체들의 시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직 직원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단속’이 강해지자 퇴직한 직원들도 타깃이 됐다. 승진에 실패한 임원이나 퇴직자 등이 새롭게 둥지를 틀 만한 곳이 마땅찮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업계에선 이런 인력들을 모은 싱크탱크 형태의 국가 연구소 설립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12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를 중국에 빼돌린 혐의로 검찰에 구속기소된 최모(65)씨가 싱가포르에서 운영했던 반도체 컨설팅 업체엔 대부분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들이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내 업체에서 입지가 줄어든 엔지니어들을 상대로 고액 연봉을 제시하며 영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업체가 반도체 생산을 위한 식각(깎아내는 과정), 세정 등 8대 공정 전체를 ‘복제’하다시피 했고, 온도와 습도마저도 똑같이 베껴 시제품까지 만든 것은 유출된 공장 설계 도면, 공정 배치도뿐 아니라 엔지니어들의 축적된 기술력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인재 유출은 수년 전부터 제기됐던 문제지만 여전히 뾰족한 방안은 없는 상황이다. 각 기업들이 노골적인 인재 사냥에는 가처분 신청 등을 통해 대응하고 있긴 해도 퇴직자의 이직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2년 전직 금지 약정’을 앞세워 소송을 해도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패소하는 경우도 있다. 법원은 해당 기술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를 비롯해 퇴직자의 지위와 경력, 퇴직 경위, 별도의 대가 지급 여부 등을 꼼꼼히 따지기 때문이다.

기술 유출을 약속하고 의도적으로 이직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승진 실패나 퇴직, 생계 등 여러 이유로 중국행을 선택하는 인력에 대해 마냥 비난만 할 수 있냐는 목소리도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퇴직자는 “일을 더 할 수 있는데 회사 내부 사정에 의해 자리가 없어지는 상황에서 경쟁사의 영입 제안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말했다.

중국 기업으로 옮긴 인력들도 상당수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요한 제조 공정에 맞는 인력을 콕 집어 데려가는 만큼 기술 확보나 공정이 정상궤도가 되면 조기에 버림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5년 계약 조건을 내걸지만 실제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기간은 1년 미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핵심 인력들이 경쟁국으로 이탈하지 않고 국내에서 계속 일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국가 주요산업 인재들을 한곳에 모아 국책 대형 싱크탱크를 만드는 것도 방안의 하나로 거론된다.

미국, 중국 등 경쟁국가와 우리나라 기업이 기술, 인력 등에서 투명하게 상생할 수 있는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후발주자들의 성장 사다리를 걷어차기만 하면 경쟁심만 높아지는 등 악효과가 있다”며 “산업 보안 등 허용된 테두리 내에서 유능한 인력에게 투명하게 기회를 주는 방안을 고심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