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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목숨 걸고 나치에 저항… 역사는 왜 그녀들을 잊었을까

입력 | 2023-06-17 03:00:00

종전 후에도 유대인 신분 노출 어려워 외면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언급돼도 ‘젊은 여성’ 프레임에 갇혀… 우리의 잊혀진 독립운동가들 떠올라
◇게토의 저항자들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 투쟁기/주디 버탤리언 지음·이진모 옮김/736쪽·3만8000원·책과함께



훈련 중 사진을 찍은 폴란드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들은 나치에 맞서 의연하고 끈질기게 투쟁했지만 종전 후 그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책과함께 제공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2015년)의 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의 실제 모델은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1872∼1933)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남자현은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경성에 잠입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1933년 주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는 거사를 하기 직전 체포돼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 순국했다.

폴란드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인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활동한 폴란드판 ‘남자현’들의 이야기를 썼다. 유대인 여성사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2007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우연히 1946년 출간된 ‘게토의 여자들’이란 책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그동안 전혀 듣지 못했던 폴란드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들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할머니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고, 오랫동안 유대인 학교에 다녔음에도 왜 이런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는지 충격을 받은 저자는 이후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나치에 저항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추적해나갔다.

“대부분의 연락책은 여성이었다. 유대인 여성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 남성의 신체적 표식이 없었기에 ‘바지 내리기 테스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중략) 나치 문화는 전형적으로 성차별적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불법 공작원이 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저자는 여성 레지스탕스들이 불굴의 정신력으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고 말한다. 가족과 친구, 남편과 애인을 잃은 고통, 폭행과 강간의 두려움도 그들을 막지 못했고,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 되면 우리도 저자가 처음 가졌던 의문에 빠진다. 왜 이런 사실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치의 만행을 만천하에 공개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폴란드 내 유대인들에게조차.

저자가 전하는 ‘그 이유’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존한 여성 레지스탕스들은 종전 후 외부 세계가 여성 투사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고사하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맞게 이용하는 데 좌절했다고 한다.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인도 많았지만, 전쟁을 이용해 유대인을 밀고하고 이용한 폴란드인이 더 많았고, 이런 분위기가 종전 후에도 이어진 탓에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도 나라를 세운 자신들과 구분 짓기 위해 유럽 유대인들의 투사 활동을 애써 지우려 한 것도 이유라고 한다. 여기에 더러 다루더라도 ‘아름답고 젊은 여성’을 부각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항일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를 분단 이후의 이념 잣대로 구분하고, 여성 독립운동가는 남성들의 뒷바라지를 한 것 정도로 여겼던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영화 ‘암살’이 나오기 전에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알았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가짜가 포함되면 안 되겠지만, ‘구체적인 독립운동 활동 증명’이 있어야 서훈을 받을 수 있으니 항일운동도 틈틈이 기록하며 하라는 걸까. 폴란드 유대인 이야기지만,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한 책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