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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싯적엔” 했던 말 또 하는 어르신… 한숨 대신 경청해 보세요[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3-06-17 03:00:00

‘라떼’ 노인의 심리
최근 기억 저장-인출 기능 쇠퇴… 말했다는 사실 잊어버려 반복
기분 좋았던 내용은 더 잘 기억… 과거 미화하며 행복감 느껴
한 맺힌 삶 회상하며 재해석하기도… 용서하고 삶의 의미 찾는 과정



노인들이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이유는 신체적·심리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노년기의 부모, 조부모와 즐거운 대화를 하고 싶다면 억지로 참고 듣기보다 그 원인을 먼저 이해하는 게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대학생 이채영 씨(24)가 명절이나 생신 때 할머니를 찾아뵈면 항상 들어야 하는 똑같은 ‘레퍼토리’가 있다. 6·25전쟁 시기 피란 떠났을 때나 먼 길을 걸어 학교 다녔던 기억, 아이 낳고 바로 농사일하느라 힘들었던 시절 등 정해진 단골 소재를 처음인 것처럼 말씀하신다.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온 내용이라 가끔 딴청을 피워도 할머니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이 씨의 할머니뿐만이 아니다. 어르신들은 예전에 했던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심지어 수십 년 전 일을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옛이야기부터 대기업 다니는 자식이나 유학 간 손자, 손녀 자랑까지 소재도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상대가 듣고 싶은 말보단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 듣다가 지친 젊은이들은 “한 번만 더 들으면 100번째예요!”라고 퉁명스럽게 반응하기 쉽다. 그러나 노인들이 했던 말을 또 반복하는 것은 주변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뇌의 노화… 말한 사실 자체를 잊는다
노인들이 했던 말을 반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뇌의 노화와 관련 있다. 대략 60세 이후부터 정보를 조직화하고 정교화하는 인지 능력이 젊을 때보다 자연스럽게 감퇴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오랫동안 머리에 남는 장기기억(long term memory) 형태로 저장하는 뇌의 해마(hippocampus)나, 주의 집중이나 정보 인출과 관련한 전두엽 등의 기능이 떨어진다. 특히 해마는 60세부터 크기가 감소하는데 미국 신경학회 의학저널 ‘뉴롤로지’에 발표된 최근 연구에 따르면 70세부터는 1년에 1%씩 줄면서 기능이 떨어진다.

물론 개인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장기기억의 저장·인출 기능이 떨어지면 특정 사건을 잊어버리거나 세부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최근 자신이 이야기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처음처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과거에 장기기억으로 저장된 내용들은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어 막힘없이 술술 말할 수 있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어렸을 때 일화는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의 의사이자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의 저자인 히라마쓰 루이는 “고령자는 ‘여러 번 말한 내용’은 장기기억이라서 정확히 기억하는데 그걸 ‘최근에 말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고 설명했다.

●“좋은 것만 생각하기에도 짧고 유한한 삶”
생물학적 노화 외에도 노인들이 했던 말을 반복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 노인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단골 주제를 떠올려 보자. “옛날이 좋았다” “내가 소싯적에 이랬다” 등 좋았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때 말하는 내용은 온전히 사실에 기반하기보다 일부분 미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이라는 것은 사실에 기초하긴 하지만 ‘나’의 주관적 입장에서 해석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100% 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당시 있었던 부정적인 일은 굳이 기억하지 않고 좋았던 내용만 부각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노인들이 부정적 정서와 관련된 것은 피하고 긍정적 정서와 관련된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긍정성 효과(positivity effect)’라고 한다. 국내외 여러 연구에 따르면 노인들은 부정적 정보보다 긍정적 정보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뿐 아니라 더 잘 기억한다. 미화된 기억을 반복해서 회상하고 말하는 이유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실험에서 사용한 사진들. 노인들은 배우자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 등 부정적 정서의 사진보다 놀이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긍정적 정서의 사진들을 더 많이 기억해냈다. TED 강연 화면 캡처

30년 이상 노인의 정서를 연구해온 로라 카스텐슨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청년기와 중년기, 노년기에 해당하는 실험 참가자를 모집해 기억력과 관련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들에게 놀이공원에서 노는 모습, 병든 배우자의 모습 등 다양한 ‘정서가 담긴’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줬다. 그리고 기억나는 대로 좀 전에 봤던 사진들을 회상해 보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청년이나 중년 참가자들은 부정적 정서와 긍정적 정서의 사진들을 비슷한 비율로 기억했다. 반면 노년 참가자들은 긍정적 정서가 담긴 사진을 훨씬 더 많이 기억해 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실험에서도 노인들은 옛날 일을 회상할 때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요소를 훨씬 더 많이 회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카스텐슨 교수는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단언한다. 기분 좋은 일에 집중하면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카스텐슨 교수는 “노인들은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행복감을 인생의 우선순위에 둔다”며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떠올리면서 불행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힘들었던 이야기 무한 반복? “과거와 화해 중”
그렇다면 노인들이 과거에 힘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뭘까. 전쟁이나 가난, 시집살이, 배우자 외도 같은 불행한 과거를 떠올리는 건 당연히 행복감이라는 목표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이 역시 역설적이게도 같은 맥락이다. 불행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핵심은 회고를 통해 왜곡된 기억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데 있다. 세계적인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은 “노년기의 발달 과업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통합감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여기서 통합감이란 지나온 고통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느끼는 평안함을 일컫는다. 반대로 과거 사건의 회한에 압도됐을 경우엔 노년기라도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통합감에 이르기 위해서 회한이 쌓인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인생에서 꽃길만 걸어온 사람은 없듯, 태어나서 나쁜 일만 있었던 사람도 없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억에 압도돼 좋았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왜곡된 기억으로 저장될 수 있다.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억울한 회한의 감정도 점차 정리될 수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아무리 한 맺힌 사건이라도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긍정적인 면을 찾아 삶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며 “나를 힘들게 했던 대상을 용서하고, 과거와 화해함으로써 ‘한 맺힌 삶’에서 ‘여한 없는 삶’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 기억을 떠올려 말하도록 하자 노인들의 우울감이 크게 줄고 삶의 만족도가 올라갔다.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우울 증상이 있는 65∼94세 43명을 대상으로 인생회고치료(Life review therapy)를 8주 동안 실시했다. 치료 방법은 간단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 성인기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그 결과 치료 전과 비교해 심각한 우울감을 느끼는 노인의 비율이 50%에서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평소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기억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잊고 있던 과거를 회상하게 됐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재구성해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팀은 “우울감으로 인해 부정적으로만 기억됐던 과거가 회고하는 말하기를 통해 단기간에 새롭게 해석되고 수정됐다”고 설명했다.

●“또 시작” 한숨 대신 어떻게?
이미 여러 번 들었던 말을 또다시 듣는 건 꽤 힘든 일이다.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자니 피곤하고, “그만하시라”고 말하면 죄책감이 든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최선의 방법은 한 명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다른 이는 듣기만 하는 대화 방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참고 견딘다는 자세로 대화하면 어떤 상대라도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항상 반복되는 이야기라도 노인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거나 아예 새로운 기억을 불러일으킬 주제를 제시하는 방법도 있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은 “억지로 참고 들으려다 보면 ‘그 얘기 저번에 하셨어요’ 같은 대답으로 소통의 다리를 끊어버릴 수 있다”며 “능동적으로 질문하고 때로는 내 이야기를 반대로 들려드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