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美中 반도체 전쟁에서 보는 역사 속 ‘쐐기 전략’[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입력 | 2023-06-18 13:40:00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왼쪽)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이 지난달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APEC 통상장관회의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쌍방은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동의하였다.(双方一致同意加强半导体产业链供应链领域对话与合作.)”

▶5월 27일 중국 상무부 보도자료
http://www.mofcom.gov.cn/article/syxwfb/202305/20230503412570.shtml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이 APEC 장관급 회의에서 만난 뒤 중국 상무부는 이 문장이 들어간 보도자료를 최근 홈페이지에 띄웠습니다. 마치 의도한 듯 보도자료 맨 끝부분에 ‘반도체’ 공급망을 운운했죠(학자들도 진의가 담긴 민감한 내용은 논문 각주나 뒷부분에 넣곤 합니다).

그런데 같은 날 한국 산업통상자원부의 보도자료에는 반도체의 ‘반’자도 나오질 않습니다. 다만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 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는 문구 정도가 나오죠. 양자 회담에서 각국이 강조 내지 주장하는 바가 보도자료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묘한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각국이 원하는 것 혹은 원치 않는 것(眞意)이 살짝 드러나죠. 다시 말해 이번 한중 장관급 회담에서 첨예한 이슈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반도체’ 공급망 이슈였던 겁니다.

이 양국 간 입장 차이를 두고 일부 국내 언론들은 미국의 압박으로 다급해진 중국이 반도체 강국 한국과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국 속셈은 ‘쐐기 전략’

미국 아이다호주에 있는 마이크론 본사.  블룸버그·게티이미지

우선 반도체 수급이 다급해졌다면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을 제재한 사실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이크론의 중국 D램 시장 점유율(2022년 기준)은 14.5%로 삼성전자(43.2%), SK하이닉스(34.6%)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반도체 수급 문제로 자동차 생산에 지장이 초래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상무부의 발표 시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이크론 제재를 발표(5월 21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반도체 공급망’을 언급했죠. 이는 마이크론 제재와 상무부 발표에 어떤 연관성 내지 흐름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것이 중국의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쐐기 전략이란 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일종의 ‘이간책’을 말합니다. 이번 건의 경우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로 부족해질 중국 반도체 물량을 둘러싸고 한미 간 균열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가 마이크론 물량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채우지 말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데 이어 미 의회 고위 인사도 이를 압박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마이크 갤러거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 “미국 상무부는 중국에서활동하는 외국 메모리 반도체 회사에 대한 미국의 수출 허가가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경험한 한국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backfilling)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무부장이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반도체 공급망에서 협력을 운운한 건 마이크론 물량 공백을 둘러싼, 나아가 미국의 반도체 규제를 둘러싼 한미 간 균열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반도체 규제 방침과 관련해 한국 정부와 업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는 5월 26일 자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도 이런 맥락에서 예사롭지 않죠. WSJ은 미국의 반도체법 시행으로 인해 대만과 더불어 중국에 대규모 사업장을 둔 한국의 타격이 특히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국책 연구기관인 KDI는 반도체법 등 미국, EU가 추진 중인 공급망 재편 전략으로 인해 한국 경제 성장률이 최대 0.641%포인트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1972년 미중 데탕트로 시계 돌리면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만나 건배를 하고 있다.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그럼 과연 이런 ‘쐐기 전략’은 역사적으로 효과가 있었을까요. 시계를 1972년 2월로 되돌려 봅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면서 중요한 첩보를 하나 제공합니다.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였죠(The National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

그러면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소련은 우리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소.”

미중 데탕트는 미소 냉전 국면에서 중소 갈등에 쐐기를 박은 신의 한수로 통합니다. 소련을 고립, 봉쇄하고자 한 미국의 대외전략에서 사회주의 양대 대국인 소련과 중국의 분열은 긴요했죠. 미중 데탕트 설계자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의 데탕트가 소련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72년 방중한 닉슨은 중국의 최대 안보 위협이던 소련 군사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중소 갈등을 이용하려는 행태를 보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미중 데탕트는 사회주의권에서 소련의 입지를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쐐기 전략’으로 평가됩니다.





1960년대 북한으로 시계 돌리면

1961년 9월 개막한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박수를 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그렇다면 ‘쐐기 전략’은 강대국 간에 말을 움직이는 그레이트 게임에 국한된 걸까요. 역사를 거슬러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 당시 중소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까지 격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경제, 외교적 실익을 얻습니다. 이른바 북한식 자주외교라는 명목하에 계산된 줄타기를 한 거죠.

북한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체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냅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중소 갈등 구조를 이용해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취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박동훈·이성환,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 시대의 대북정책”,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때론 김일성이 직접 나서 중국을 겨냥해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내비치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당, 로동당들은 의견 상이(相異)로 하여 통일 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에서 마땅히 놀아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의견 상이가 더는 확대되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역량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 단결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합니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보고’)

미중 데탕트가 한창 무르익던 당시 중국이 미제와 손을 잡는다면 북한도 소련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인 셈입니다. 비록 소국이지만 사회주의체제 내 분열을 이용해 강대국을 쥐고 흔든(꼬리가 몸통을 흔든) 사례죠.





중국 ‘쐐기 전략’ 어떻게 대응하나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렇다면 쐐기 전략에 대해선 어떻게 대응하는 게 현명할까요. 동맹국과의 분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국익을 지킬 수 있는 묘안을 짜내야 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국의 진의(이간책)를 꿰뚫고 있다면 과잉 반응을 자제하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는 있죠.

그럼 서두의 마이크론 사태로 돌아가 보죠.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 이후 공백을 우리 기업들이 채워야 할까요, 말까요? 그런데 바로 이런 질문이야말로 중국이 원하는, 동맹(미국)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일도양단의 논리로 흐를 수 있습니다. 공백을 메운다면 미국에, 그렇지 않으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니까요.

이런 이분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다시 살펴볼까요. 전문가들은 반도체 유통구조상 마이크론 물량을 대체한 주문에 대해 이것이 과연 그것인지를 콕 짚어 판별하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전자제품을 만드는 세트업체인 A사가 삼성전자, 마이크론, 난야 테크놀로지(대만)의 반도체를 각각 주문해 사용한다고 칩시다. A사가 어느 날 마이크론과 난야 부품을 줄이고 삼성 것을 늘리면 이것이 마이크론을 대체한 것인지, 난야를 대체한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

이처럼 독점 시장이 아닌 이상 복수 제품들의 조달 현황을 꼬리표를 붙여 일일이 추적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결국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 중국 정부 간 핑퐁 게임은 사실상 ‘레토릭’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이크론의 공백을 채우느냐, 마느냐의 이분법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관망하면서 조용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쐐기’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한미동맹 유지 및 강화)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 아닐까요.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