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문화부 차장
산은 굳건하고 물은 흐른다. 곧 장마가 지고 나면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의 서백호인 인왕산 암벽 아래 수성동(水聲洞)은 그 이름처럼 올여름도 계곡물이 철철 흐를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의 한낮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계곡 위쪽 좁은 바위틈에서는 누군가가 자리를 틀고 책을 펼칠 것이다. 계곡 아래쪽에선 이제 걸음마를 뗀 아기가 앙증맞은 발바닥으로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찰박이며 생애 첫 물놀이를 할 것이고, 좀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올챙이를 좇아 반바지가 젖는 줄 모를 것이다. 기자는 운 좋게도 이 동네에서 어린 자식들과 몇 년을 살았다.
겸재 정선(1676∼1759)이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북악)계곡에 이르는 장동 일대의 뛰어난 풍경을 그린 장동팔경첩에도 수성동이 나온다. 이 그림에는 작은 돌다리(기린교)를 막 건넌 선비들과 동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다리는 1960년대 옥인시범아파트 건설 당시 망가져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9년경 돌연 다시 ‘발견됐다’. 사실 기린교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오래도록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잊혔을 뿐이었다.
관심이 없어지면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울에 근대에 들어 잊힌 대표적인 것이 ‘물의 기억’이다. 외국인들이 서울의 산을 보고 놀란다지만 물은 산과 함께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진 가장 큰 이유였다. 조선시대 한양 지도를 보면 물길이 거미줄처럼 도성 안을 지난다. 작은 다리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생활하천이었으므로 계곡에서 멀어질수록 그렇게 깨끗하진 않았겠지만 둑에는 꽃이 피었을 것이고, 아기자기한 다리를 건너는 운치가 넘쳤을 것이다. 큰 물(한강)은 너무 커서 잊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 작은 물(개천)은 거의 잊혔다.
백운동천이 시작되는 곳이자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지내며 활동했던 옛 백운장 터가 매각될 상황이라는 소식을 최근 들었다. 시간을 내 찾아가 보니 산딸기가 지천이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지만 사유지인 탓인지 발길이 뜸해 보였다.
서울의 개천들은 백운동천처럼 근대 들어 대개 복개돼 도로가 됐다. 누구의 땅도 아니었기에 수용이 간편했던 탓이다. 그렇게 만든 도로를 통해 서울이 발전을 이뤘으니 그 역시 잘못됐다고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제 잊은 것을 돌아보며 다른 도시를 상상할 때가 됐다. 서울시는 중학천(삼청동천)과 함께 백운동천의 물길을 되살릴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실현된다면 지금의 청계천에 자연 하천으로서의 가치를 일부나마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백운동천 발원지를 백운장의 역사와 연계해 생태·역사공원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나온다. 물과 산이 어우러진 진짜 서울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