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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 아껴라’ 유언에 화장 성행… 호족 득세로 다시 매장[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3-06-19 23:33:00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3월 전국의 화장률은 92.1%에 달한다. 2006년 화장률이 매장률을 추월한 이래 주검을 화장하는 방식이 대세가 되었다. 또한 정부는 연초 화장 후 뼛가루를 산이나 바다에 뿌리는 산분장(散粉葬)의 제도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화장 그 이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우리 역사에서 지금 정도는 아니지만 화장묘가 크게 유행한 시기가 있었으니 통일신라 때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삼국통일 후 신라에서는 전통적 석실묘가 급감하고 약 2세기 동안 화장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거대한 파도처럼 신라를 휩쓴 화장 풍습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왜 사라졌을까.


‘검소한 장례’ 모범 보인 삼국통일 주역
천년고도 경주는 거대 무덤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시내 곳곳에는 동산만큼이나 큼지막한 무덤들이 즐비한데 대부분 마립간기 신라 지배층의 유택이고, 일부를 발굴한 결과 그 속에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황금 장식이 다량으로 묻혔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법흥왕 때인 527년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의 전통적 무덤 양식이 변화를 겪는다. 석실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무덤의 크기가 작아지고 부장품의 양이 급감한다. 그렇지만 이후 1세기 이상 석실묘의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즉, 불교의 공인이 곧 화장묘의 유행을 이끌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장례 풍습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화장이라는 새로운 장례 방식을 쉽사리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신라에서 화장이 유행한 것은 불교가 공인된 지 약 150년이 지난 7세기 후반의 일이다. 새로운 유행에 불을 댕긴 인물은 문무왕이다. 그는 통일의 대업을 이룬 지 5년째 되던 681년 죽음을 맞았는데, 죽음을 예견하고 평소 믿고 의지하던 스님에게 “죽은 뒤 호국의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자 하니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 달라”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글을 남겼는데, “아무리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니 헛되어 재물을 쓰거나 사람들에게 수고를 끼칠 필요가 없다. 궁궐 문밖 뜰에서 서쪽 나라 방식에 따라 화장하라”고 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석함과 뼈 단지로 구성된 통일신라 9세기경 장골기. 석함(위쪽 사진) 표면은 다각으로 다듬고 뼈를 담는 녹유 단지(아래쪽 확대 사진)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일제강점기 도굴돼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환수된 다음 국보로 지정됐다. 석함 높이 43cm, 뼈 단지 높이 16.4cm.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시점에 이르면 경주 분지에서는 여전히 석실묘가 만들어졌지만 지방에서는 석실묘가 거의 사라졌다. 그에 대신하여 야트막한 능선 정상부나 양지바른 사면에 자그마한 장골기가 무리지어 묻힐 뿐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국가 차원에서 문무왕의 유조(遺詔)에 따라 백성들의 장묘문화를 마치 요즘의 ‘가정의례준칙’처럼 규제하였기 때문인지 혹은 불교가 백성들 사이에서 뿌리내림에 따라 불교식 장례 문화가 확산된 결과인지 분명치 않으나 전자일 가능성이 있다.

통일신라의 왕은 문무왕에서 시작하여 경순왕까지 27명이다. 이 가운데 고려에 나라를 넘기고 개경에서 여생을 보낸 경순왕을 제외한다면 26명의 신라 왕이 경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역사서에는 그중 8명의 장례 때 화장이 선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삼채 장골기에 누구의 뼈가 담겼나?
화장이라는 절차는 공통적이지만 뼛조각을 처리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원성왕, 효공왕, 신덕왕의 경우 화장 후 땅에 묻었다고 하고 효성왕, 진성여왕, 경명왕 등은 바다나 산에 뿌렸다고 한다. 화장처로는 궁궐보다는 사찰이 많았다. 역사 기록이 워낙 소략하여 신라인들이 세상을 뜬 왕의 유해를 어떤 방식으로 화장했고, 또 어느 곳에 뼛조각을 묻거나 뿌렸는지 상세히 알기 어렵다. 경주 곳곳에서 발굴된 장골기가 신라의 화장 풍습에 관한 상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지만, 대부분의 중요 장골기는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것이라서 원래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묻혔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경주 조양동에서 출토된 8세기 당삼채 뼈 단지(위 사진). 당시 최고급 수입품이었던 당나라 삼채를 사용해 학계에서는 단지의 주인을 신라 왕이나 진골 귀족으로 보고 있다. 높이 16.5cm. 경주 북군동에서 출토된 기와집 모양의 8세기 장골기(아래 사진). 뼈 단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높이 43.3cm.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다만, 1973년 경북 경주시 조양동 성덕왕릉 남쪽 야산에서 왕에 준하는 인물의 장골기 하나가 우연히 발견돼 그러한 아쉬움을 일부 달래줬다. 석탑 지붕돌처럼 생긴 석재 속에 8세기 무렵 당나라에서 들여온 당삼채 장골기가 들어 있었다. 뚜껑으로 사용된 동제 접시는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근래까지 신라 유적 여러 곳에서 삼채가 출토됐지만 이에 버금가는 명품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에서 수입한 고급 삼채 속에 담겼을 뼛조각은 누구의 것일까? 이 화장묘는 성덕왕릉, 효소왕릉 등 신라 왕릉에서 불과 500여 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수입품이던 삼채를 장골기로 사용한 점, 석함까지 갖춘 특별한 구조라는 점을 함께 고려할 때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은 인물이 그것의 주인공이었을 공산이 크다. 학계에서는 원성왕을 그 후보로 특정하기도 하고, 원성왕의 경우 괘릉에 묻힌 것으로 보면서 왕이 아닌 진골 귀족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호족의 시대’ 되살아난 매장 풍습
역사 기록과 근래의 발굴 성과로 보면 9세기 후반의 신라는 새로운 변화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었음에 분명하다. 중앙의 집권력이 흔들리면서 지방 각지에서 스스로를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군웅할거하는 이른바 ‘호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화장에 대신하여 매장이 마치 복고풍처럼 되살아났으며 곧이어 매장에 대한 선호가 봇물 터지듯 폭발하였다. 이후 전국 야산 곳곳에 매장 방식의 가족묘가 조성되었고 불과 수십 년 전까지 그러한 전통이 강고하게 이어졌다.

이처럼 신라의 화장 풍습은 단순히 그 시대 주검의 처리 방식을 보여주는 데 국한하지 않으며, 그것에는 신라사의 큰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화장묘와 화장 풍습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장차 신라 장골기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진전돼 통일신라 신라 문화의 다양한 면모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