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독자의 신비한 조응, AI 답변과 달라 책은 ‘물질화된 사람, 살아있는 정신’이란 말도 인간 고유한 정신으로 남은 건 누구도 침해 못해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준비는 이른 봄부터 시작됐다. ‘비인간’이라는 주제로 소설 청탁이 왔고 반가운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했다. 봄부터 원고를 쓰고 교정을 보고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책을 받아들기까지 반년 정도가 흘렀다. ‘비인간’을 주제로 쓴 에세이와 소설을 모은 이 책은 도서전에서만 배포되는 특별판이다.
원래 소설가 소설은 잘 쓰지 않지만 특별판에서는 문학편집자와 평론가, 소설가들이 등장하는 얘기를 썼다. 오픈AI가 등장하면서 어느 때보다 인간의 쓰는 능력에 대한 우려와 비관, 회의가 난무하던 시절이라 책과 그 생산자들에 대해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인터넷 공간의 정보를 ‘긁어모아’ 생산하는 인공지능의 텍스트들이 책을 압도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쓰는 작가와 자기 삶의 일부를 들여 그것을 읽는 독자 사이에 오가는 신비로운 조응은 질문 하나로 동작하는 프로그램과는 차원이 다른 과정 아닌가 싶었다.
그런 점에서 박혜진 평론가가 쓴 ‘작가의 조건’이라는 산문은 책의 생명성에 대해 다시 한번 환기하는 글이라 반가웠다. 그는 사실 자신은 주변 사람들에 비해 “책에 대한 열정이 없는 편”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한 생산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를 안다면 의아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실제 그에게 책은 지식 등을 위한 “도구”에 가깝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증명해 보이는 (책을 향한) 사랑”을 목격할 때마다 낯선 느낌을 받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그 역시 책의 신비로운 생명성에 대해서는 열렬하고 힘 있게 확신한다. “읽는 사람이 지닌 단어의 깊이만큼, 수용할 수 있는 서사의 진폭만큼, 말하자면 그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인식의 크기만큼만 자신을 보여”주는 책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매번 변화를 겪는 살아있는 존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은 “물질화된 정신이자, 정신화된 사람”이라는 말에서 나는 깊은 동의와 함께 어느 맥락에서는 안도감도 느꼈다.
나는 한 번은 독자로서, 한 번은 특별판 에디션에 참여한 작가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녀왔다. 도서전이 중요한 이유는 그간 알지 못했던 책들과 출판사들이 ‘큐레이션’ 된다는 데 있다. 마치 이제 막 펼친 책의 경이로운 목차처럼 행사장에는 그런 세계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 공간 자체가 가장 “정신화된” 공동체였다.
이 특별판에는 이번 도서전에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가 논란으로 물러난 오정희 작가의 작품도 함께 실려 있다. 처음 책을 받아들고 오랜만에 발표된 그의 신작부터 펼쳐 읽은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서전이 끝난 날 밤, 나는 도서전의 대형 전광판이나 행사장 무대에서는 사라졌지만 도서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책에는 정정되거나 삭제되지 ‘못한’ 무언가를 생각한다. 이를 테면 그런 책의 엄정함 같은 것. 한번 세상에 나아가면 그것을 ‘읽는’ 인간 각자의 고유한 정신으로 남아 누구도 침해할 수 없게 된다는 책의 오래된 물성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