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파병된 미 스미스 부대 첫 전투지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출발점 역사적 의미 오산시, 다음달 5일 초전기념식 열어…“국가적 지원” 강조 이권재 시장 “한미동맹 심장부 죽미령, 국가가 기억해야”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 있는 ‘거울 연못’. 추모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다. 오산시 제공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지 올해로 70년을 맞았다. 경기 오산시는 해마다 7월 5일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유엔군 초전 기념 및 스미스 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을 연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미군을 기리고 죽미령 전투를 기억하자는 취지다.
● 6·25 전쟁 10일 만에 미군 참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원조를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 날 오전,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에게 “한국을 도울 방법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맥아더 사령관은 수원 비행장에 도착해 서울 등을 돌며 전황을 살펴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같은 달 30일 북한에 대한 공습을 승인했다. 이렇게 미 지상군 파병이 결정됐다. 유엔군 지상 병력이 6·25전쟁에 처음 투입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6·25전쟁 당시 죽미령 전투에 사용됐던 전차, 소총 등 무기들. 오산시 제공
● 미군의 첫 전투, 죽미령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찰스 스미스 중령의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540명을 한국에 파병했다.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죽미령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950년 7월 5일 8시 16분, 북한군 5000여 명은 소련제 T-34 전차 8대를 앞세워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스미스 부대는 105mm 곡사포로 맞섰다. 오후 2시 반까지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북한군 127명을 사살하고 전차 8대를 파괴했다. 하지만 소규모 화력만 갖춘 스미스 부대는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부대원의 3분의 1 정도인 18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박연희 오산시 학예연구사는 “죽미령 전투는 유엔군이 패배한 전투지만 당시 북한군도 재정비하는 데 열흘이 넘는 시간을 들일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라며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던 중요한 전투”라고 설명했다.
미군의 첫 전투인 죽미령 전투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1차 방어선으로 미군의 참전을 알리는 전투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죽미령 전투 이후 김일성은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큰 혼란에 빠졌다”라며 소련의 스탈린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친필 서한을 보냈을 정도다. 맥아더 장군도 훗날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완수하는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고 회고했다.
초전기념비 앞에 도열해 있는 미군들. 오산시 제공
● “잊지 않겠습니다, 죽미령”
6·25전쟁에 참여했던 미군은 첫 전투였던 죽미령 전투를 7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대표적인 사례가 초전기념비 공사다. 1964년 제8군, 제24사단, 육군동지회, 재향군인회에 이어 1972년에도 제8군, 제802공병대가 보수 공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지게 부대’로 불렸던 한국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도 힘을 보탰다. KSC는 전쟁물자 전달을 위해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는 모습이 알파벳 A와 닮았다고 해서 미군은 이들을 ‘A-Frame Army’로 불렀다.
주한미군은 캠프 험프리스의 평택 이전을 앞두고도 주요 지휘자들이 오산 죽미령을 찾았다. 캠프 험프리스에는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유일한 한국군 윤승국 예비역 소장의 성을 딴 ‘윤 게이트’(Yoon Gate)가 있다. 주 출입구인 동창리 게이트가 바로 윤 게이트다.
오산 죽미령 스미스 평화관에 전시된 메시지. 오산시 제공
● 540개 돌에 새겨진 전우
스미스 부대가 첫 전투를 벌인 지 70년이 되던 2020년 7월 5일, 죽미령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됐다. 공원 한쪽에는 초전기념비가 서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스미스 부대원들은 1955년 죽미령에 돌아와 전사한 전우를 기리며, 돌에 부대원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이렇게 540개의 돌로 이뤄진 ‘초전기념비’가 세워졌다. 전투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동판도 붙였다.죽미령 전투 참전의 역사를 기록해 둔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2013년 4월 문을 열었다. F-86 F 세이버 전투기, 미군 M48 전차, 장갑차 등이 전시돼 있다. 죽미령 전투와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계 조형물’, 추모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울 연못’,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부대원들이 탑승해 이동했던 ‘더글러스 C-54 조형 게이트’ 등도 이곳에 있다.
이권재 오산시장(사진 왼쪽)이 이달 초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만나 죽미령 초전 기념식을 국가 기념행사로 격상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오산시 제공
● “초전 기념식 국가 기념행사로”
올해 초전 기념식 슬로건은 ‘한미동맹의 출발지, 오산 죽미령에서 다시 시작’이다. 이권재 오산시장은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추도식을 국가 기념행사로 격상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유엔군 초전 기념식의 위상과 규모가 확대되면 참전국과의 보훈 외교 강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 시장은 이달 초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만나 기념식 격상을 건의했다.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죽미령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이 6·25전쟁에서 처음 전사한 유엔군인 만큼 기념식의 의미를 잘 살펴보겠다”고 화답했다.
국가기념행사 지정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데, 행사의 파급력과 취지·목적 등을 살펴 국무회의에 보고한 뒤 시행할 수 있다”고 했다.
조영달기자 dalsar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