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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국대’ 목표로 아기띠 매고 턱걸이했어요”

입력 | 2023-06-23 03:00:00

국가대표로 돌아온 클라이밍 여제 김자인 선수
은퇴 시기 미루고 파리 올림픽에 도전




3년 만에 복귀한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인 선수. 지호영 기자

“우와, 클라이밍 해보셨어요? 처음엔 당연히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죠!”

김자인(35) 선수에게 ‘클라이밍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 김 선수가 운영하는 암장(클라이밍센터)에서 그는 “클라이밍을 해봤다”는 기자의 말에 한껏 신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높아진 목소리 톤에 동네 언니 같은 친근감이 느껴졌지만 그의 이력은 사실상 ‘넘사벽’이다.

그는 ‘클라이밍 여제’, 즉 우리나라 클라이밍의 전설로 통한다. 2022년 1월 기준 IFSC(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에서 개최하는 클라이밍 월드컵과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리드 종목에선 29회나 우승을 차지했다. 2017년에는 클라이밍의 대중화를 목표로 123층 555m 높이의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를 맨손으로 2시간 29분 만에 오르기도 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이 아쉽게 좌절되고 선수 생활 은퇴를 생각했던 그가 3년 만에 태극마크와 함께 돌아왔다. 4월 클라이밍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한 번 더 올림픽 출전권에 도전할 기회를 얻은 것. 암장을 비운 동안 그에겐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 바로 2021년 3월,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의 사이에서 결혼 7년 만에 얻은 소중한 딸 규아의 엄마다. 그가 암장에 다시 온 까닭은 무엇일까.

국가대표 선발 축하드립니다.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내년 파리 올림픽 출전권에 도전하려면 올해 국가대표부터 돼야 하거든요. 오랜만에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대회에서 뛰는 감회가 남다르더라고요.

이번 선발전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던데요.

지난해에도 국가대표 선발전에 도전하긴 했어요. 2021년 3월에 출산하고 1년 만에 다시 경기에 나간 거예요. 당시에는 몸 상태가 꽤 돌아왔다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전혀 아니었어요(웃음). 그래서인지 지난해 선발전에서는 떨어졌어요. 이후 계속 훈련을 했죠. 이번 선발전에 맞춰서 몸을 잘 만들어오다 일주일 전엔 갑작스럽게 손가락 부상을 당했어요. 쉬운 과정이 하나도 없었죠.

손가락 부상에도 국가대표 자리를 따냈네요.

왼쪽 4번째 손가락 인대가 부분 파열된 상태였어요. 다행히 완전 파열된 건 아니었죠. 6주 정도 휴식을 권고받았지만 이번 선발전이 제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전이다 보니 ‘무조건 나가야겠다’ 싶었어요. 통증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행히 치료는 잘됐고, 지금은 거의 다 회복했어요.


아이에게도 클라이밍 재미 알려주고 싶어
그가 본격적으로 클라이밍 국제대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건 2010년. 올해로 14년째 우리나라를 대표해 활동하고 있다. 이젠 고참이 된 그는 국가대표 선수단에서도 맏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선수는 현재 서채현(20), 사솔(29) 등 다른 선수들과 함께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얻기 위해 국제대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2020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할 계획이었다고요.

원래 도쿄 올림픽 도전을 선수 생활 마무리로 생각했던 건 맞아요. 그러다 보니 임신, 부상, 코로나19 팬데믹 등 여러 상황이 겹쳐 도쿄 올림픽에 제대로 도전해보지 못한 게 아쉬웠죠. 제 의지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잠깐의 공백기에도 신체 능력을 유지했네요.

아이를 낳고 3주 뒤부터 가벼운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금 훈련 강도와 양의 4분의 1 정도로요. 솔직히 말하면 임신한 상태에서도 클라이밍은 했어요(웃음). 임신 8개월을 넘어가니 배도 많이 나오고 무거워져서 못 했지만요. 살짝 몸을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가볍고 쉬운 코스를 올랐어요.

출산 후 한 달도 안 돼서 운동을 시작했다니 대단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운동도 하고 싶잖아요. 아기 띠를 이용해서 아이를 등에 업고 턱걸이를 하거나 손가락 트레이닝 보드에 매달려 있었어요. 마치 운동할 때 중량을 다는 느낌으로요. 돌이켜 생각해봐도 출산하고 다시 몸을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무엇보다 힘든 건 육아와 훈련을 함께 해야 한다는 거였죠.

2023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암벽을 오르는 김자인 선수. 올댓스포츠 제공

국제대회를 누비는 클라이밍 여제인 그도 딸에게만큼은 사랑만 주고 싶은 엄마다. 그는 아이를 두고 “인생에서 클라이밍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고 표현한다. 어느덧 세 살이 된 딸의 이름만 들어도 방긋 미소를 지을 정도. 아직까지 ‘엄마 선수’라는 타이틀은 스포츠계에서 보기 힘든 수식어다. 그는 “아이가 언젠가 ‘왜 은퇴했냐’고 물을 때 ‘너를 낳아서’라고 대답하긴 싫었다”며 “파리 올림픽 출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딸에게 끝까지 도전하는 모습을 남기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가 암장에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딸인 셈이다.

처음 임신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저는 임신 가능한 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종목 특성상 몸을 가볍게 하려고 1일 1식만 하면서 키 152cm에 몸무게 40kg을 유지했거든요. 아이를 갖기 어려울 정도로 저체중이었죠. 애초에 산부인과도 정기 건강검진차 들렀어요. 의사 선생님이 아기집이 보인다고 해서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때 알지 못했으면 배가 나와서도 몰랐을 거예요.

선수 커리어가 걱정되진 않았나요.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경기를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해서 운동을 잠시 쉬던 중 생긴 아이라, 오히려 아기에게 고마웠어요. 어쨌든 부상과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취소 등 여러 상황이 겹쳐 올림픽 출전은 무산됐거든요. 출산 후에도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크진 않았어요. 규아는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게 도운 하늘이 준 선물이에요.

엄마와 운동선수 역할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힘들게 운동한 날에는 “집에 가면 쉬어야지” 했는데, 아이가 생기니 집에 가면 또 다른 일 육아가 시작되더라고요. 쉬면서 회복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요.

육아, 훈련, 사업까지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암장에 출근해요. 경기 의정부에 있는 저희 집에서 이곳(암장)까진 약 8km 떨어져 있는데 조깅을 할 겸 뛰어와요. 제 암장을 연 후로는 여기서 훈련도 하고 업무도 처리해요. 오후 7시쯤 집에 가면 육아가 시작되죠. 그때부터는 보통 엄마와 같아요. 지금은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가까운 거리에 사셔서 번갈아 아이를 봐주시는데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도 훈련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는 복 받은 편이죠. 하지만 다른 엄마 선수 중엔 이런 여건이 되지 않는 분도 많아요. 운동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누군가 아이를 돌봐줘야 뭐든 해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책이 있을까요.

막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구단이나 소속 팀에서 아이 돌봄 시스템을 갖춰주면 좋겠어요. 엄마 선수가 아이를 그곳에 맡기고 훈련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게끔요. 많진 않아도 일부 사기업은 기업 부설 어린이집 등 육아 지원 제도가 잘돼 있는데, 운동선수는 구단이나 소속 팀 차원의 지원이 부족한 편이에요.

아이에게도 클라이밍을 권하고 싶나요.

딸이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함께 암장에 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웃음). 그래도 로망은 있어요. 딸이 조금 더 크면 같이 운동도 하고 산에 가서 암벽 등반도 하고 싶어요. 꼭 선수를 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클라이밍이 얼마나 재밌는 운동인지 알려주고 싶어요.

올해 많은 대회가 남아 있는데 목표가 있나요.

저는 “결과를 잘 내야지” “몇 등을 해야지”보단 눈앞의 코스를 완등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해요. 솔직히 말해서 올림픽 티켓(출전권)을 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시아버지가 종종 해주시는 말씀을 빌리고 싶어요. 과정엔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진인사 대천명’이요. 이번 도전에도 그렇게 임하고 싶습니다.




이경은 기자 ali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