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거리를 걸은 적이 있었어. 그런데 어떤 남자가 아버지 모자를 쳐서 길바닥에 떨어뜨렸어. 그 남자가 외쳤지. ‘유대인! 인도로 다니지마!’”
나지막이 대사를 읊던 배우 신구가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연극 ‘라스트 세션’ 대사 중 기억나는 한 구절을 요청하자, 그는 자세를 고쳐 앉고 ‘프로이트’로 순식간에 변했다.
“자연인으로 죽을 때가 가까워졌잖아요. 누구도 예측할 순 없지만, 이게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죠. 힘을 남겨 놓고 죽을 바에는 여기에 다 쏟아붓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는 22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두 번을 공연했는데 아직 미진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런 부분을 더 잘 채워보려 노력하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니까 고맙다. 내가 오히려 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라스트 세션’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9월3일을 배경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20세기 무신론의 시금석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와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루이스가 한 치의 양보 없이 신과 종교에 대한 도발적인 토론을 펼친다.
신구는 이번 시즌에 특히 대사에 신경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관객들이 편하고 즐겁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사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모여서 대본을 읽을 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오랫동안 토의해도 쉽게 답이 안 나오는데, 대사가 슬쩍 지나가는 공연에선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죠. 관객들에게 대사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대사에 집중하고 있어요.”
지난해 3월 ‘라스트 세션’ 공연 중 건강 문제로 입원도 했던 신구는 “요즘은 소리를 질러도 지장이 없다”고 미소 지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두 교황’,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장수상회’ 등 연극도 꾸준히 이어왔다.
“그때 차에서 내려서 집에 가는데 쉬었다 갈 정도로 갑자기 숨이 찼어요. 급성 심부전이었죠. 심장 박동이 제대로 뛰질 않아서 산소가 부족해 숨이 차고 어지러웠던 거죠. 공연이 끝난 후 입원해서 박동기를 넣는 시술을 받았어요. 이제는 심장이 느리게 뛰거나 쉬면 이 녀석이 자극해서 박동수를 맞춰요. 한 10년은 간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그 무렵 신구 선생님과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당연히 같이 한다는 전제로 계속 말씀하셨어요. 그 자리가 끝날 때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연습하며 그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앞선 두 번의 공연보다 더 기대돼요. 신구 선생님께는 항상 겸손하게 기본으로 돌아가서 연습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많이 배워요. 남명렬 선생님과는 3년 만에 만났는데, 배려에 늘 감사하고 날카로운 연기에 대단하다고 느끼죠.”
뮤지컬 ‘베토벤’, ‘벤허’, ‘프랑켄슈타인’ 등 대극장 무대를 활보한 카이는 7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다. 이상윤과 함께 루이스 역을 번갈아 연기한다.
그는 “작품적으로 완성도가 깊고, 또 한 명의 연기 무대 스승을 모시고 2인극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무엇보다 평생을 철저한 유신론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매력을 크게 느껴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이번 작품은 제게 큰 발전의 기회이자 행운이죠. 어려서부터 쭉 음악과 함께 생활해 왔지만, 무대에서 가장 단순하고 본질에 가까운 배우의 모습으로 역할을 표현해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목표보다는 어떻게 더 비워내고 본질에 접근할까 고민하고 있죠.”
방대한 대사량과 쉽지 않은 내용도 숙제다. 그는 “유신론자로 격한 공감 속에 이 작품을 마주한 게 장점이었다. 암기는 어려웠지만, 이해하는 데는 힘들지 않았다”며 “부담감보다는 작품에도 나오는 단어인 ‘기쁨’을 진정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뉴시스]